내 기억 속 학교 역사 시간은 늘 구석기 시대로 시작한다. 삼국시대를 거쳐 오천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 현대사로 넘어오면서 시간에 쫓겨 지극히 사건 중심적으로 마무리되던 수업. 이후 수많은 투쟁과 정의로 이룩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대한 기억보다 ‘태정태세문단세’만이 머리 한 켠에 남은, 어떤 의미도 느끼지 못할 단순 암기 내용만이 떠오른다.

투쟁이 지니는 의미, 이를 감행하기 위한 순수한 정의와 용기의 소중함에 대해 일찍이 알지 못했다. 자라오면서 배웠던 역사 교과서 이상의 것을 보려는 노력은 해본 적도 없었다. 지금의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대한민국이란 이름 뒤 그것이 지닌 아픔을 몰랐다. 그렇기에 518 민주화운동은 어디선가 한 번쯤 배운 희미한 기억의 끄트머리에 걸려있었다.

지난 18일 광주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렸다. 9년 만에 518 민주화운동을 추모하는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졌다. 기념공연에서는 ‘슬픈 생일’이란 제목으로 518 당시 태어나던 날 아버지를 여읜 유족의 사연이 공개됐다. 오월의 광주가 사람들에게 다시금 되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유족들의 아픔을 넘어 광주의 영령들이 겪었을 잔인한 고문과 그로 인한 후유증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그 고통을 절박하게 묘사했으나 한 편의 글만으로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고통이었을 것이다. 스물이 채 되지 않았던 학생들까지 겪었던 잔인한 그 순간. 이를 겪었던 모든 이들이 우리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영령이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소설 ‘소년이 온다’(저자 한강) 中 제4장 쇠와 피 발췌 121쪽)

부디 518 민주화운동이 잊혀지지 않기를, 촛불을 들고 나라를 바꿀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숭고한 정신으로 518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본교생들에게 축제의 하루로 지나가버렸을 5월 18일은 그들을 위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진 날이었음을 새겼으면 한다.

‘소년이 온다’ 6장 ‘꽃이 핀 쪽으로’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막둥이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 끝에서 어머니는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싫어했던 아들을 떠올린다.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그 꽃 핀 길이, 밝은 곳이 광주의 영령들을 기리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가 아닐까.

*5·18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과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 등을 외치며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한솔 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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