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것 같지 않던 긴 겨울이 지나고 봄기운이 따스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부시고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초여름의 문턱까지 다다랐다. 새 대통령이 취임한 지 며칠만에 업무지시 2호로 국정 역사교과서 폐지를 지시했다고 한다. 1년 반이 넘도록 교육계를 혼란에 빠뜨렸던 느닷없는 국정교과서 논란은 결국 이렇게 일단락되어 가는 것 같다. 사필귀정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지만 왜 이런 논란에 기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하면 허무하고 허탈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선악(善惡)이 개오사(皆吾師)’라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안에서 모두 배울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영화 ‘변호인’으로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대화’하는 주체는 바로 ‘나’이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끊임없이 과거의 사실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오늘의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내일을 전망하는 통찰력을 갖춰가는 과정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Carl Becker도 “역사는 항상 새롭게 다시 쓰여지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역사학은 해석의 다양성을 학문의 본질로 삼는다.

국정 역사교과서 논란은 지난 정부와 보수 단체가 몇몇 검정교과서를 소위 ‘좌편향’ 교과서로 지목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부 검정교과서가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폄훼하고 북한 정권을 찬양한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백번 양보하여 일부 검정교과서에 ‘좌편향’적 서술이 있고, 역사학계의 90%가 ‘좌편향’이라고 치자. 그럼 누가 이런 ‘좌편향’ 사회를 조장했는가? ‘좌편향’ 교과서의 집필진을 포함하여 역사학계의 90%에 해당하는 대부분 학자들은 유신과 5공 시대의 획일적인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 독재시대의 국정교과서는 지금의 ‘좌편향’ 사회를 조장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한 지난 정부가 ‘좌편향’ 사회를 조장하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국정 역사교과서가 사회의 ‘좌편향’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은 이미 역사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지난 정부의 획일적인 국정화 시도가 국민의 저항에 직면하여 좌절된 역사가 또 다시 기록되었을 뿐이다. 

사실 역사 교과서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3년 ‘좌편향’으로 지목된 검정교과서에 맞서 뉴라이트 측에서 집필한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자 2014년부터는 뉴라이트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에 대한 비난과 채택 철회를 요구하는 여론의 공세가 이어졌다. 지난 정부가 국정 역사교과서를 무리하게 밀어붙인 것도 당시의 논란에 대한 대응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보면 뉴라이트 교과서를 채택하려 했던 학교는 극소수였다. 우리가 획일성을 배격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면, 상대가 나와 다르든 틀리든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논쟁과 설득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비난과 강요는 불만과 반발을 낳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의 상황은 99%가 1%를 포용하지 못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다수가 그 힘에 의지하여 소수의 틀림을 기어이 고쳐놓고 말겠다는 또 다른 획일성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 획일적인 역사인식에 젖어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고등학교 시절 학생회 간부를 대상으로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다. 교련복을 입고 촛불과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피가 끊어 오르는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내가 왜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는지를 생각해보면, 나는 민족주의 역사교육을 충실하게 받은 모범생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 모두가 반만년 전통에 빛나는 찬란한 문화를 가진 민족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피 흘린 선조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하며 애국심을 키웠다. 그 결과 우리는 주변국과의 역사 인식 문제를 접하면 무슨 일에든지 총화단결하여 저항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에도 획일성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과거의 역대 정부는 이러한 국민 정서를 자극하여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국민을 정부 시책에 복종시키고, 국내 정치의 위기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교묘하게 이용하곤 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민족주의가 정치권력에 의해 국가주의로 변질되기 쉽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정치권력의 부역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국정 역사교과서 논란이 일단락되어가는 지금, 이러한 소모적인 논란을 재현하지 않으려면 틀린 1%도 합리적인 비판으로 인내심을 갖고 설득하려는 포용력과 자기 의식 속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또 다른 획일성을 성찰하는 엄격함을 갖추어 극단의 대결을 피하는 기술을 배워야 할 때이다. 

홍성구 교수

(사범대 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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