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기자로 활동하며 늘 태연하게 넘기기 힘든 말이 있다. “그걸 ‘왜’ 학보사가 취재해요?”

차라리 취재원이 “그걸 ‘무슨 이유’로 취재해요?”라고 물었다면 아주 흔쾌한 마음으로 취재가기 전부터 속으로 내내 곱씹고 준비했던 기사 주제와 취재 계획을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취재원은 기자에게 어떤 목적으로 자신을 취재하고자 하는지 충분한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특정한 상황에서 ‘왜’라는 부사의 의미는 미묘해진다.

그런 상황의 나는 대개 취재원이나 취재원이 소속된 곳의 부정적 문제를 취재하러 온 기자다. 대학 내부의 일일 때도 있으며, 대학 외부의 일일 때도 있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하는 취재원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이 경우에는 응답을 회피하려고 한다. 응답을 회피해도 말 한마디 듣겠다고 찾아온 나를 만난 취재원의 표정은 당연히 밝지 않다. 그는 내 명함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내가 어떤 기사를 쓰고자 하는지 가만히 듣더니 대뜸 한마디를 던진다. “그걸 왜 학보사가 취재해요?” 이때 ‘왜’에는 방어적이고 공격적이며 의문이 아닌 의심과 힐난이 섞인다. 그 미묘한 뉘앙스는 첫 번째, 자신들의 문제를 왜 굳이 들춰가며 취재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는데다 두 번째,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그가 독자들에게 주는 인상이 결코 좋지는 않을 것이며 세 번째, 프로 기자도 아닌 어린 학생이 기자라고 찾아왔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악의적인 의도로 쓰고자 하는 기사가 아니라고 설명부터 시작한다. 물론 그런 말에도 취재원은 좀처럼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는다.

때때로 기자는 성가신 참견꾼으로 치부된다. 기자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을 얘기를 질문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그러한 권리를 무시당하거나 기자 스스로 무시함으로써 현재처럼 수많은 폐단이 쌓이지 않았는가? 공공을 위해 합당한 이유로 취재할 경우, 기자는 국민의 알권리를 지키기 위해 사회로부터 ‘질문할 권리’를 보장받는다. 경북대신문은 경북대학교 구성원의 알권리를 지키기 위한 신문으로, 이를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질문할 권리가 있다. 잘못된 일을 명예와 이미지를 위해서라고 덮어놓고 보는 건 능사가 아니며, 알리는 것이 오히려 명예와 이미지를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믿기에 우리 기자들은 계속 성가시게 굴 것이다. 당신에게 참견할 것이다. 당신의 문제가 결국 경북대신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5월 9일,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치솟는 물가와 실업률, 집값 등 현실의 문제는 언제나 가깝게 느껴지지만 지난 4년간 그 문제들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졌다. 거리에서 촛불을 들던 국민들은 이제 새 정부에게 적폐 척결과 내 나라의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질 것이다. 속기사처럼 고분고분 받아쓰기를 하던 이전과 달리 국민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질문해 줄 언론을 바란다. 그 질문에 가슴 깊이 공감하고 성실히 응답할 대통령을 바란다.

김서현

편집국장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