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에는 장미꽃 향기와 싱그러운 신록과 어우러진 형형색색의 젊음으로 넘쳐나고 있다. 계절의 여왕인 5월 한가운데, 이 땅의 젊은이들은 겨우내 뼛속까지 파고들던 삭풍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 대학의 낭만은 사치가 된 지 오래다. 학점관리, 취업시험 준비, 학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 봉사활동까지 대학생의 어깨에 걸쳐진 삶의 무게는 가늠조차 어렵다. 대학은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하는 곳이어야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대학에서 ‘이상과 진리, 사랑과 낭만 그리고 꿈과 미래’와 같은 가치가 사라진 지 오래다.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는 초라한 움츠림만 남아있다.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구직과 실업의 아픔을 맛봐야 하고 학자금대출 상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미래를 꿈꾸며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생경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청년 실업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능력에 맞는 일자리는 생계 수단만이 아니라 자아실현을 위한 디딤돌이다. 어릴 적부터 교직을 꿈꾸어온 사범대생에게는 학교가, 건축가를 희망하는 공대생에게는 건설현장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제공되는 일자리는 최저임금의 아르바이트 자리나 인턴 사원이라는 이름의 비정규직이 고작이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반도체분야에서 13조 원을 신규 투자하였지만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는 고작 650개에 그쳤다. 투자가 고용으로 이어지는 시대는 지났다는 뜻이다. 최근 너도나도 할 것 없이 ‘4차산업혁명’을 이야기한다.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4차산업혁명은 피해갈 수 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4차산업혁명의 실체와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디지털화, 인공지능, 로봇, 인터넷, 가상공간, 실시간 소통, 물류, 빅데이터’와 같은 신기술·신개념을 산업에 접목시켜 나간다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독일은 ‘산업화 4.0Industrie 4.0’으로 4차산업혁명을 선도하고 있다. 독일 최대 노동조합인 금속노조IG Metall과 산업체 대표들이 작성한 합의문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산업화 4.0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4차산업혁명의 핵심은 생산성 향상과 효율성 극대화이므로 로봇과 기계가 인간을 대체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므로 제조업분야의 일자리 감소는 피해갈 수 없다. 2017년에 본격 가동될 예정인 아디다스 ‘Speed Factory’의 경우 2개 생산라인에 설치된 6대의 로봇이 연간 50만 켤레의 신발을 생산하게 된다. Speed Factory의 생산로봇이 처리하지 못하는 공정은 신발 끈을 묶는 작업인데, 이 단순작업이 인간에게 떨어지는 일이 된다. ‘고용절벽과 노동의 질 저하’라는 4차산업혁명의 어두운 단면이 극명해진다. 

4차산업혁명의 희생은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키고 과실은 자본가들이 독식하게 할 수는 없다. 법인세 인상과 같은 기존에 논의되던 방법 외에 생산라인에 투입되는 로봇에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획기적인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4차산업혁명과 함께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는 “인간이 어떻게 기술과 자본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느냐?”이다. 인간다운 삶을 유지시키고 지구 환경을 보존하는 데 기여하는 일자리 창출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간병인, 어린이 도우미, 환경지킴이’와 같이 인간이 해야 하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2017년 현재 경북대학교의 현실은 암울하다. 부당한 권력은 부역자의 도움으로 커나가고 불의는 무관심으로 살찌운다. 2016년의 2순위 총장 임명사태는 치유되지 않는 깊숙한 상흔을 남겼다. 국립대들은 교육부의 전횡에 휘둘려 대학의 가치를 버린 지도 오래다. 

우리는 지난겨울 촛불을 들어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으로 탄생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새로운 시작을 위한 걸음을 내디뎠다.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는 결코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이제 학생과 교수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미래, 희망, 이상, 보편적 가치’와 같은 달달한 것을 이야기할 때이다. 너와 나 손을 맞잡으면 희망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학생들은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연대하고 참여하고 사회적 합의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교수들도 제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질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 제시해야 한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스승의 날’이 찾아왔다. 스승이 스승답지 못했기에, 대학에서 스승과 은사는 사라졌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치는 분명 남아있다. ‘스승의 날’을 맞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아닌 진정한 스승의 길을 가기 위해 옷매무새를 고치고자 한다. 내년 ‘스승의 날’에는 스승의 모습을 닮아가는 나를 그려본다.

이형철 교수

(자연대 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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