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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아름다운 자아와 함께 산 청년, 윤동주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올해는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암흑기를 견디게 해준 이 시인이 있어 우리 문학사는 다행히 적빈(赤貧)은 면하였다. 1948년 1월에 나온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에서 당대 최고의 시인 정지용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附日) 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고 일갈한 것도 이런 문학사적 의미에 대한 지적이다.   
윤동주는 늘 이육사와 함께 이름이 거론된다. 이 두 사람은 일제 말기에 시를 남긴 시인으로서, 항일운동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이국의 감옥에서 광복을 눈앞에 두고 숨을 거두었다는 운명적인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3년 연상인 이육사는 문단에 먼저 진출한 동생(이원조)이 있고 또 사회활동 경력이 있어, 잡지나 신문에 정식으로 등단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생전에 신문 학생란을 제외하고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 적이 없다. 그의 시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1940년대는 우리말로 시를 발표하기 힘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가 시인의 자격으로 인쇄매체에 실린 것은 그의 사후인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에 실린 「쉽게 쓰여진 시」라 할 수 있다. 정지용의 소개와 함께 실린 이 작품은 그의 시가 지닌 기본적인 특질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에서 드러나는 내면 지향적인 특성,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에서 보이는 부끄러움의 감정,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에서 보이는 또 다른 자아의 등장 등이 그것이다.
이런 특질 중에 가장 근원적인 것은 또 다른 자아의 문제이다. 윤동주의 시에는 다른 시인의 시에서 잘 볼 수 없는 또 다른 ‘나’가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이 ‘복수의 나’의 해명이 그의 시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 「또다른 고향」에서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 「흰 그림자」에서


윤동주에게 이 ‘수많은 나’, ‘복수의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쉽게 쓰여진 시」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자.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이 부분에서 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마음을 정갈하게 한 후에 새로운 시대처럼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는 현실적 자아와 구별되는 또 다른 자아이다. 그것은 현실적 자아가 지니는 결핍, 예를 들어 자신의 지향대로 삶을 살지 못하는 무기력, 현실과 타협하고자 하는 유혹을 견디지 못하는 연약함 등을 보완해주는 이상적 자아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자아는 ‘아름다운 혼’의 자아, 간단하게 말하여 아름다운 자아이다.
윤동주에게는 이처럼 지상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자아 이외에 또 다른 자아가 있었다. 이 자아는 현실적 자아인 시인에게 개인적 주관으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개관(槪觀)하게 한다. 시인이 맞닥뜨린 삶을 거리를 두고 시대와 역사라는 커다란 차원에서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이런 자아를 곁에 두고 있다면 어두운 방에 홀로 있어도 마음대로 죄를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런 자아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는 내면 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이 둘은 상호작용을 하며 함께 간다. 그의 부끄러움은 이런 자아로부터 생겨난다. 아름다운 자아의 절대적 가치를 잣대로 지니고 있을 때 자신의 모든 삶은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회록」의 참회도 이와 관련된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흔히 이 「참회록」의 참회를 일본 유학에 필요한 도항증을 받기 위해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윤동주의 경험과 연결시킨다. 이런 방식은 실증적인 사실과 연계시켜 시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시를 특정한 사실에 종속시켜 보편적인 성격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시인이 창씨개명한 것을 참회한다고 보면, 이 시에 나오는 미래의 참회가 해명되지 않는다. 젊은 날의 참회가 ‘부끄런 고백’이 되어 버려 창씨개명한 것이 오히려 합리화되는 이상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는 아름다운 자아에 의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현실적인 자아를 다룬 시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윤동주의 참회는 인간 본연의 행위이지 특정한 경험에 대한 일시적인 성찰이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윤동주의 시가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런 아름다운 자아를 생각하게 함에 있다. 우리들에게도 또 다른 자아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것은 세속적 가치에 물든 자아이다. 현실적 자아에게 바람직한 지향을 제시해줄 수 없거나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조장하기까지 하는 부정적 자아, 타락한 자아가 대부분이다. 아름다운 자아와 사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 자신의 삶을 비춰보면 안다. 
아름다운 자아와 함께 산 자만이 그의 삶과 그 결과물을 순수하고 정갈하게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역사 앞에 자신을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으며, 그래서 가장 어두운 시대의 적빈을 면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윤동주 시를 읽으며 그의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은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예의가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고향
              윤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박현수 교수
(인문대 국어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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