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동문인 이은수 변호사(법대 법학 84)는 1991년 첫 여성 군법무관으로 임관해 육군 고등검찰부장, 육군본부 법무실장 등을 거쳤다. 2011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해 법무병과 첫 여성 장군을 지내며 금녀의 영역이라 불리던 군에서 여성으로서의 길을 개척해 갔다. 군 법무병과에서 많은 여성 최초 타이틀을 가져왔던 그녀는 2014년, 23년 간 입어왔던 정든 군복을 벗고 군 전문 변호사로 옷을 갈아입었다. 서울의 로펌에서 만난 그녀는 전역 후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눈빛과 말투에서 군인의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Q.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원래 수학과 과학을 좋아해서 이공계를 가려 했었다. 그런데 내가 다녔던 시골 고등학교가 남녀공학인데 여자 이과반이 없어 인문계열로 진학했다. 그때는 동일계 가산점이라고 대학 진학 때 같은 계열로 지원하면 10% 가산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말은 반대로 동일계를 안 가면 남들보다 10% 감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집안의 고모부께서 법대를 나와서 “여자는 법대를 가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듣고 이공계 대학진학은 포기하고 법학과로 진학했다.

Q. 군법무관을 지원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선배들이 군법무관에 지원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 계기이다. 한창 대학생활을 할 당시에 나는 법무관이 뭔지도 몰랐다. 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대구시청에서 사법시험과 군법무관 원서를 같이 접수 받았다. 당시 1년 선배가 이상한 원서를 쓰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군법무관 원서였다. 그래서 창구에 가서 군법무관 원서를 달라고 해 군법무관에 지원했다. 군법무관은 지원자가 몇 명 없어서 서울에서만 시험을 쳤다. 동기들 10명 정도가 군법무관 1차를 친다고 같이 갔는데 여자는 나 혼자였다. 서울에 시험을 치러 갔을때 동기들이 “니는 가면 쫓겨날지도 모른다”면서 놀리더라. 다행히도 내쫓는 건 없었다(웃음). 나중에 들어보니 나 외에도 지원한 여자가 있었다더라.사법시험 1차에 떨어진 후에는 KDI(한국개발연구원)에 취직했다. 하지만 KDI는 경제연구소라서 박사들이 주인이었다. 법대를 나온 사람들은 행정업무만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법조인 생활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직장에 다니는 동안 군법무관 2차 시험을 준비했고 결국 합격해 임관했다.

Q. 군법무관 임관 당시에는 유일한 여성 이었는데, 힘든 점은 없었나요?

나 혼자 여자니까 힘든 건 당연했다. 동료가 전부 다 남자이다 보니 내 속을 드러낼 사람이 없었다. 또 임관 초기에 보직을 얻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법무참모라는 보직이 있는데 사단에 있는 법률조언자라고 볼 수 있다. 군에서는 사단장이 행정사법권을 지니고 있는데 사법권을 보조하는 역할이 법무참모인 것이다. 나를 받아주는 사단장이 없어 처음에는 육군에서 필수 보직인 참모로 나가지 못했다. 당시는 여자 참모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이었다. 결국 동기들보다 2년 뒤에야 참모로 나갈 수 있었다. 당시에 받아준 사단장의 부인이 간호장교 출신이여서 상대적으로 여군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2008년 육군 2작전사령부 법무참모 때 발생한 400억 원 규모의 창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사건을 꼽으셨어요. 당시 수사 상황은 어땠나요?

그 사건에서 내가 한 것은 육군에서 관심 없는 사건을 수사하도록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주변의 어느 부대에서 한 장교가 임관해서 온 후, 주식투자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며 자신에게 투자를 하면 이자율을 20%, 30% 주겠다고 부대원들을 속여서 투자금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그 해당 부대에서 법률자문을 구하니 ‘사적거래 아니냐. 그걸 어떻게 막냐’며 아무도 그 부분을 건드리지 못했었다. 사령관이 새로 부임하면 각 부대를 순시하게 되는데, 당시 사령관이 그 와중에 이 사안을 건의받게 된다. 사령관이 돌아와 대책위를 열었고 당시 휴가 중이던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사적거래가 아닌 사기였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육군에 수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침 부하 부사관이 ‘인가·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불특정 다수인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유사수신행위로 처벌 받는다’는 점을 얘기해줬고 그 부사관의 끈질긴 노력으로 수사가 진행됐다. 결국 그 장교의 계좌를 열어보니 400억 원 규모의 돈이 들어있는 것이 밝혀졌다.그런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막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정보를 입수하는 단계에서 최선을 다했고, 사건을 해결했다는 것에 굉장히 보람을 느꼈다.

Q. 가정과 군인이라는 신분의 양립이 힘든 적은 없으셨나요?

물론 있다.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보직을 수시로 옮겨 다니다 보니 딸의 성장기에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았다. 딸과의 애착관계가 형성이 잘 안 돼서 힘들었다. 또 군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 영내에서 밤을 새야하는 근무가 있다. 그럴 때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면 난감하다.또 부대 자체가 시골에 있기 때문에 육아를 위한 위탁 시설이 별로 없었다. 딸아이가 또래 아이들도 없으니 힘들어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데리고 다니지 못했고 할머니께 딸을 맡겨 일주일에 한 번 딸을 봤다. 또 2007년 사별한 남편의 병 간호 때도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 당시에 대령 2차 진급과 남편의 병마가 겹쳐 힘든 시기를 보냈다. 대령 진급을 위해서 법제과장 보직을 맡은 상황에서 남편의 병을 발견했다. 시어머니께서 간호를 해주셨지만 항암치료 때에는 간호를 위한 병가를 나눠서 써가며 병상을 지켰다. 당시 부서원들이 많이 도와줬다. 나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일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줬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부서원들이 나의 드림팀이었던 것 같다.

Q. 임관 당시 여군에 대한 대우는 어땠나요?

앞선 세대에서는 술자리에 불려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한다. 하지만 나는 법무관이라는 지위가 있기 때문에 피부로 와 닿는 심각한 차별 대우는 없었던 것 같다. 여군의 역사를 보면 88년도까지는 여군병과라는 것이 따로 있었다. 그러다 89년 즈음 개별 병과에 여군이 지원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내가 임관할 당시는 이제 막 여군의 영역을 넓히는 시기였고 장교 교육을 법무관 동기와 받았어야 했는데 여군과 함께 받았다. 요즘은 여성 법무관이 최전방 철책사단에서 법무차관을 할 정도로 영역 제한이 없으며 다 잘 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법무병과 장기장교에서 여군의 비율이 40%나 될 정도로 그 비중이 커졌다. 옛날에는 아무리 여자가 똑똑해도 남자보다 못하다, 공부는 여자가 잘해도 일을 시키면 남자가 잘한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부분을 타파해야 한다. 군인을 평가할 때 성별보다는 능력 위주로 바뀌고 있고 그만큼 여군은 신뢰를 주고 있다.

Q. 가장 관심이 많은 영역을 군 인권 문제로 뽑으셨습니다. 현 군 인권의 실태는 어떤 상황이고 그 해결책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관심이 많은 부분인데 변호사가 된 후 아직까지 관련 사건을 못 맡았다. 예전에 비하면 군 인권은 많은 개선이 있었다. 선임들이 눈치를 보는 시대까지 왔고, 폭언이나 폭행이 줄어들긴 했으나 아직은 문제들이 남아있다. 개선을 위해서는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 결국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선임 중에 변화된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세대가 이어져야 인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김민호 기자/kmh16@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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