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가리키며 이웃이라고 칭해본 적이 없다. 옆집에 살면 옆집사람, 윗집에 살면 윗집사람이지 그가 나의 이웃이었던 적은 없다. 오히려 이웃이란 말은 아주 어색하게만 들린다. 여러 콘텐츠를 통해 접한 상상 속의 이웃은 거리낌 없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고 반찬거리를 나누러 온 사람 정도다. 낯선 사람이면 옆집에 살더라도 문을 꼭 걸어 잠글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그래도 반찬거리를 나눠먹는 상상은 양호하지 않은가. 한 가지 더 떠오르는 게 있긴 하다. 윗집과 아랫집의 층간소음이 극에 달해 흉기난동까지 이어졌을 때, 언론에서는 자주 ‘이웃사촌 간에’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그렇다, ‘이웃’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은 딱 그만큼이다.네이버 지식백과에 검색을 해보면 이웃은 ‘물리적인 근린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회적 관계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웃관계는 지연적 관계의 하나로 마을의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리적인 근린관계 측면에서는 그 관계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벽 하나 세워두고 원룸이 생기고, 그런 건물들이 밀집돼 있으니 가까이 사는 이를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로부터 심한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말한 지식백과의 내용 중에 ‘사회적 관계의 모태’라는 말이 언급된다. 즉 이웃이라는 근린관계를 이룸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뜻인데, 나는(어쩌면 당신도) 근린관계에서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는 데 매번 착오를 겪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밀접한 사회적 관계를 마련해주는 이웃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대구가 꾸준히 진상규명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유가족과 ‘이웃’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호 6면 취재를 위해 만난 세월호참사대구시민대책위원회 상황실 활동가 한유미 씨는 대책위 구성원들이 안산에 자주 가서 유가족과 당직도 같이 서고 술도 한 잔하고 작업도 같이 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는 ‘이웃’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우리는 모두 이웃이고, 한 나라의 국민이지 않은가?” 청소년 극단 ‘memorize’ 소속 이유정 씨도 우리 모두 ‘이웃’이라고 말했다. 대구에서 안산까지 버스 타고 약 4시간. 근린관계라기에는 멀다. 그렇다면 이 두 도시를 잇는 연결고리, 한유미 씨와 이유정 씨가 생각하는 ‘이웃’은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취재원들의 입에서 ‘이웃’, ‘공동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왔다. 서로를 잇는 하나의 코드가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했다.그것은 바로 거리를 넘어선 사회적 연대다.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공감이자 연민이다. 도저히 ‘개인’으로는 견뎌낼 수 없는 일을 ‘우리’는 맞설 수 있다는 용기다.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기에 그를 공감할 수 없다. 그러나 4월 16일을 기억하고,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이는 나의 이웃을 외면할 수 없다. 외면하지 않고 알려고 할수록 나는, 당신은, 우리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이웃이 될 수 있다.

김서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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