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히게 좋은 시절이다. 생명과 색감(色感)이 점령군처럼 세상을 접수해버렸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생의 환희와 약동이 물결처럼 넘실댄다. 봄은 모름지기 ‘보는’ 계절이다. 넉넉한 비와 온유한 기온이 화합하여 꽃과 풀이 솟구친다. 교정에 넘쳐나는 꽃들의 향연을 보고 있는가?! 봄의 화사함을 온몸으로 펼쳐내는 벚꽃은 어느새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 하지만 어디 봄꽃이 벚꽃뿐이랴! 이미 자취 없이 스러진 매화와 산수유, 개나리와 진달래, 살구와 동백도 봄의 전령이다. 명자꽃과 옥매, 조팝과 싸리나무를 덧대야 한다. 눈을 내리깔면 민들레와 제비꽃, 씀바귀와 꽃잔디가 곳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연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잔디와 허다한 풀들도 제각기 봄단장이 한창이다. 그렇게 봄은 왔다.그런데 궁금하다. 어여쁜 꽃들은 왜 지는 것일까?! 사시사철 제자리에서 화려한 자태를 유지하면 아니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운명을 달리한 분들을 위한 희생제의(犧牲祭儀)라는 설도 있고, 끝내 함께하지 못한 인연을 설워함이라는 얘기도 있다. 소월은 <진달래꽃>(1925)에서 작별의 사무치는 정한(情恨)을 진달래 꽃길로 노래했다. 떠나는 임이 가시는 길에 한 아름 진달래꽃을 뿌리겠노라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심정을 단아하게 그려낸다. 그러하되, 속인(俗人)인 나는 달리 생각한다. 나의 명제는 단출하다. “떨어지지 않는 꽃은 꽃이 아니다!” 떨어지기 때문에 꽃은 꽃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계절 한자리에 똑같은 양태로 정지해 있는 꽃은 생명이 고갈된 조화(造花)일 따름이다. 이런 논리에는 순환의 사유가 자리한다. 돌고 도는 자연의 이법이 내재해 있다는 얘기다. 꽃이 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열매다. 벌과 나비 등속(等屬)과 바람이 매개한 열매가 꽃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다. 두 계절이 지나면 열매도 땅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를 꽃눈이 메운다. 엄동설한을 견뎌낸 꽃눈에는 지난 시절의 추억과 상처와 영광이 들어있다. 열매는 또 어떤가. 자유 낙하한 열매는 대지에서 썩는다. 하지만 썩어가면서 열매는 씨앗을 온전히 길러낸다. ‘한 알의 밀알’에 대한 성서의 비유는 그렇게 나온 것이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크고 작은 나무들의 대물림은 그렇게 이어진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우리의 사유는 ‘소유(所有)’로 전이(轉移)한다. 내가 가진 것이 어떤 순환경로를 경과할 것인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초중등학교를 거쳐 도달한 보편학문의 전당 대학.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애주기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최고최대의 배움터. 그곳에서 습득하는 각종 지식과 정보의 쓰임새를 생각해보는 것이다.지식은 귀납적 추론이나 연역적 사유로 얻어진다. 직관과 통찰 역시 지식생성의 중요한 원천이다. 우리는 쓰임새를 생각하면서 지식을 축적하고 정보량을 확장한다. 허다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지식과 정보의 무한축적과 확대재생산에 주력한다. 그러다보니 현대인들은 지식과 정보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우리 모두가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의 온순한 종이 된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우리는 그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꼭 끌어안고 살아간다.개인이 전유(專有)하는 지식은 오래가지 못하며, 그 쓰임새 또한 사적인 용도에 국한된다.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적-정신적 수준은 인공지능과 견주면 일천하기 그지없다. 2013년에 제작된 영화 <그녀 Her>의 인공지능 운영체계 사만다는 0.2초 만에 한 권의 책을 섭렵한다. 그럼에도 수많은 청춘남녀는 오늘도 지식과 정보습득에 여념이 없다. 지식욕에 불타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것처럼 지식과 정보를 탐한다. 하지만 버려야 얻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내가 소유한 것을 과감하게 던져버릴 때 더 크고 아름다우며 소용 닿는 것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법이다. 자신과 가족의 범주에 함몰되어 지식과 정보를 전유하고자 했던 파렴치한들의 면면을 우리는 날마다 확인한다. 그들은 한국사회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었다. 신탁(神託)에 맞섰다가 급전직하 파멸해간 오이디푸스처럼 무너져 내린 그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어제오늘 지고 있는 꽃을 본다.나무와 풀, 바람과 구름, 자연은 사적인 소유를 고집하지 않는다. 사계운항의 법칙을 따라 물처럼 흘러갈 따름이다. 주어진 시공간과 인과율(因果律)에 따라 묵묵히 주어진 소임을 행하는 것이다. 꽃과 풀과 나무가 봄날의 흐드러진 향연을 노래하고 있음은 지난 계절의 시련의 결과다. 현란한 향연은 꽃의 실종이라는 상실과 대면하지만, 그것은 열매를 거두려는 결단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지로 돌아간 꽃의 후예는 아낌없이 썩어져 대를 잇는 것이다. 하여, 묻노니 청춘이여. 그대들은 정녕 썩을 준비가 되었는가?!

김규종 교수

(인문대 노어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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