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목적은 ‘창의(創意, creativity),’ ‘상상(想像, imagination)’ 그리고 ‘공상(空想, an idle fancy)’의 의미를 정의하는데 있다. ‘창의’와 ‘상상’ 그리고 ‘창의성 함양’과 ‘상상력 키우기’가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지만 창의와 상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창의성을 함양하고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은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사고와 언어, 그리고 과학의 본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인류의 인식세계를 확장하는 역할을 해준다.  

Edelman에 따르면 ‘의식은 뇌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설명하기 힘든 느낌 및 통증까지도 포함하여)’이다. 의식 중에서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감각, 지각, 불안감, 설렘, 통증 등을 제외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사고’이다. 사고는 다시 ‘사실적 사고’와 ‘비사실적 사고’로 나뉜다. 

‘사실적 사고’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생각하는 주체가 사실이라고 믿어야 하며, 둘째, 타자(他者, others)들도 사실임에 동의하는 객관성이 있는 생각이어야 한다. 가령 뜰에 핀 목련을 바라보며 ‘저 꽃이 눈처럼 희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실적 사고이다. 생각하는 주체가 그것을 사실로 믿고 있으며 타자들도 사실임에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창의, 상상 및 공상은 모두 ‘비사실적 사고’의 영역에 속한다. ‘비사실적 사고’는 생각하는 주체의 어떤 생각이 객관적으로 아직 사실이 아닌 것이다. 창의, 상상 및 공상의 경우에는 생각하는 주체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직 사실이 아님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경우이다. 정신병적 이상 현상을 나타내는 용어인 망상(妄想, delusion)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며 그것이 사실로 실현될 가능성도 없지만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논의를 생략한다.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창의, 상상 및 공상은 ‘비사실적 사고’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차이점은 ‘비사실적 사고’의 실현 가능성에 있다. 실현 가능성이 높으면 ‘창의’가 되고, 실현 가능성이 덜 높으면 ‘상상’이 되며,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면 ‘공상’이 되는 것이다. ‘공학적 혹은 자연과학적 상상력’도 말은 되지만 이 표현보다는 ‘공학적 혹은 자연과학적 창의성 혹은 창의력’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이며 더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대로 ‘인문학적 창의성’이라는 표현도 가능하지만 이 표현보다도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표현이 더 자주 쓰이며 더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문의 성격상 공학적 혹은 자연과학적 창의는 실현 가능함을 실험이나 창조(創造, creation), 즉 신제품 생산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허수가 1,000종을 넘을 정도로 많은 발명을 한 발명가 Thomas Edison을 설명할 때 ‘뛰어난 상상력’이라는 표현보다는 ‘뛰어난 창의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그것은 Edison의 창의가 곧 백열전구와 같은 신제품의 창조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 판타지 소설인 해리포터 시리즈를 쓴 Joan Rowling을 묘사할 때 ‘뛰어난 창의력’보다는 ‘뛰어난 상상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그 내용이 공상에 가까워 실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인 것이다. 그 내용들의 실현 가능성이 없음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Rowling을 ‘공상가’ 혹은 ‘공상 소설가’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실현 가능성’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현재로선 실현 가능성이 없고 헛된 생각처럼 보이는 공상도 긍정적이며 유익할 수가 있다. 중앙일보(2015년 11월 17일 자)에 따르면 공상과학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했던 다섯 가지 상상 혹은 공상 중에서 ① 이온 분출로 추진력을 만드는 이온엔진은 이미 현실화 되었으며, ② 레이저 무기, ③ 생명체 복제, ④ 홀로그램은 일부 실현되었으며, 마지막으로 ⑤ 중력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반중력 장치는 아직까지 불가능한 공상의 영역에 남아 있다고 한다. 오늘의 공상이 내일의 상상이 되고 훗날엔 창의가 되어 신제품으로 창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창의, 상상 및 공상은 ‘비사실적 사고’라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실현 가능성의 높낮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사실적 사고’라는 지적과 상대적인 비교만으로는 이들이 완전하게 정의되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창의’에 대한 보다 완전한 정의를 내릴 것이다. ‘창의’가 정의되고 나면 ‘상상’과 ‘공상’까지도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될 것이다. ‘창의’는 ‘사고,’ ‘언어,’ 그리고 ‘과학’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 

사고, 언어, 그리고 과학의 본질은 ‘개체의 속성이나 개체들 간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한다.’라고 할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떤 개체의 속성이나 어떤 개체와 다른 개체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가 ‘말한다.’라고 할 때 무엇을 말하는가? 의문문이나 명령문 등도 언어의 일부이지만 평서문이 언어의 핵심이다. 평서문의 역할은 개체의 속성이나 어떤 개체와 다른 개체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연구자의 생각으로 이 세상에 대해서 연구한 것을 표현하는 과학은 연구자의 생각과 그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고와 언어의 본질이 개체의 속성이나 개체들 간의 관계를 생각하고 표현하는 데 있으므로 과학도 개체의 속성이나 어떤 개체와 다른 개체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즉 사고, 언어 및 과학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과학이 ‘개체의 속성이나 개체들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라면, ‘과학을 한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개체와 관계에 대하여 각각 다음 3가지의 작업을 한다는 의미이다. 개체에 관해서 첫째, 개체의 속성을 바르게 정의하기, 둘째, 새로운 개체를 찾아내기, 셋째,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던 가짜 개체를 지우는 작업이다. 그리고 관계에 관해서도 첫째, 개체들 간의 관계의 속성을 바르게 정의하기, 둘째, 개체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찾아내기, 그리고 셋째,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던 개체들 간의 가짜 관계를 지우는 작업이다. 우리가 ‘공부한다,’ ‘연구한다,’ 혹은 ‘과학을 한다.’ 등 어떤 용어를 쓰든지 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은 결국 개체와 관계에 관한 위에서 지적한 여섯 가지의 작업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의 역할이 위 단락에서 정의한 것이라면 왜 개별 과학이 매우 다르게 보이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다루는 개체와 관계의 종류가 다르며, 둘째, 개체와 관계를 다루는 방법과 도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개체 중에서는 일상생활에서 관찰이 불가능한 미생물이나 나노 세계, 초고온이나 초저온 상태의 개체, 광입자와 같이 빨리 움직이는 개체도 있으므로 실험실이나 특수시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다루는 개체의 수가 늘어나면 개체 간의 관계 수도 늘어나는데, 개체를 다각형의 꼭짓점으로 간주하면 관계의 수는 ‘다각형의 변수와 대각선의 수의 합’이다. 개체의 수가 4개이면 관계의 수는 6이지만 개체가 1,200이면 관계의 수는 719,400으로 늘어남으로 표본조사나 통계처리가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과학의 A 분야와 B 분야가 다르게 보여도 ① 개체와 관계를 다루는 방법과 도구의 차이라는 껍질과, ② 다루는 개체와 관계의 종류의 차이라는 껍질을 벗기고 나면 남는 것은 결국 개체의 속성과 개체간의 관계를 바르게 정의하는 것이다.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들여다보든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하든 간에 결국 ‘개체의 속성을 정의하거나 개체들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역할이 위와 같다면 이제 ‘창의성,’ 혹은 ‘창의성이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이다. ‘창의성이 있다.’는 말은 위에서 제시하였던 6가지 과학을 하는 행위를 잘 한다는 의미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6가지 행위에서 스스로 문제를 잘 찾아내고 찾아낸 문제를 잘 푸는 학생이 창의력이 있는 학생인 것이다. ‘상상’과 ‘공상’은 창의와 본질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그 내용의 실현 가능성의 높낮이에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창의, 상상 및 공상의 의미가 위와 같다면 이것들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는 자명하다. 이것들을 통해서 개체와 관계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은 인류의 인식의 한계를 넓히는 작업이며 인류가 만물의 영장으로 계속해서 생존해 갈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는 작업인 것이다. “지식보다 상상력을 더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지식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합니다.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온 세상을 다 포함합니다.”라고 한 아인슈타인의 대답도 창의, 상상 및 공상을 아우르는 비사실적 사고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일 것이다. 

데카르트의 명제 I think, therefore I am에서 동사 think 다음에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생략된 목적어는 무엇일까? 감히 제안한다면 그것은 ‘개체들의 속성과 그것들 간의 관계들’이다. 따라서 I think (of the properties of entities and their relationships), therefore I am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게끔 되어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즉 무념(無念)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무념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라면 차라리 헛된 생각이 아닌 생산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생략된 ‘개체의 속성과 그것들 간의 관계’를 생각하는 일이 보람 있지 않겠는가? 경북대 구성원들 모두가 자기가 처한 현장에서 개체와 관계에 관한 바른 정의를 좇아 배고픈 승냥이처럼 캠퍼스를 배회하는 날이 Eliot이 April is the cruelest month라고 외쳤던 4월과 함께 오기를 기다린다.

김노주 교수

(인문대 영어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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