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라지는 것들에 적응한다. 그리고 언제나 사라짐 이후의 새로움을 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근의 가게가 사라져도, 주위 사람들이 곁에서 멀어져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단골 가게라든가, 친척이 돌아가시거나 하는 등 반복된 일상의 흐름이 깨지면 우리는 그것에 애도를 표한다. 하지만 그 또한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다시 일상에 돌아가면서 사라지는 것들로부터 일상을 침해받는 것을 방어한다. 그러나 사라짐에 무딘 것과는 정반대로 새로움이 등장하면 영민하게 반응한다. 새로운 것들이 일상에 침입하는 순간, 사라지는 것에 반응할 때보다 호의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보이고, 낯선 세상의 접촉에 기꺼이 응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내 생각을 말해본 적이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연인이 사라지더라도 그렇게 반응할 수 있냐’는 반응이 많았다. 애석하게도 절친, 가족, 단골집, 오래된 습관 등 자신이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것들이 아닌 이상, 사람들은 사라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반면 새로운 무언가가 생기면 막연히 기대를 한다. 동네에 새로운 음식 체인점이 생기면 붐비는 것과 달리 사라지기 직전인 가게에는 모두가 방문하길 꺼려한다. 탄핵 인용 직전의 촛불집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예전 같지 않았었고,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세월호의 존재조차 점차 잊혀지고 있었다. 지인 중에는 세월호 사건 당시 팽목항에 며칠간 머무르며 분노하는 사람,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에 울분을 토하는 사람, 연인과의 이별을 겪고 슬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은 다들 그랬다는 것을 망각하기라도 한 듯 일상으로 복귀했다. 삶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거나 숨기고 싶은 사실들을 잊고 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망각하는 점을 비판하고 싶진 않다. 나 자신도 그렇단 사실을 최근 들어 다시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먼지 덮인 장기판을 발견했다. 그 장기판의 존재를 망각한 지 10년이 넘어서야 ‘유품 정리’라는 새로운 사건 덕에 다시 기억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장기판을 쓰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작은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만 쓰던 장기판은 10년 전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올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더 이상 쓸 수 없는 장기판이 돼버렸다.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아버지는 장기를 둘 때마다 동생이 생각나셨는지 점차 장기 두기를 꺼리셨다. 그렇기에 장기 둘 짝을 잃은 나도 장기를 두지 않았고, 장기판을 망각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쓸 곳이 없어진 장기판을 나는 유품을 태울 때 같이 태워 연기로 날려 보냈다. 그렇게 또다시 망각한다.

도경록

(경상대 경영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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