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총회는 2만 복현 학우의 최고 의결기구다. 총학생회는 회칙 상 본교에 재학 중인 학부 학생 전체가 속해 있는 기구이므로 학생총회는 학생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직접적이고도 최고의 수단이다. 지난 18일 본교 학생주차장에서 열린 학생총회는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불발됐다. 이날 비는 계속해서 내렸고 준비했던 2,500개의 의자 중 남은 1,800개에는 비가 대신 채우고 있었다.

사진: 김서현 기자/ksh15@knu.ac.kr

2016, 빗줄기 가운데 또다시 불발된 총회

학생총회 소집을 앞둔 금요일, 낮부터 시작된 빗줄기는 학생총회를 앞둘수록 거세졌다. 오랜만에 내린 가을비는 하필 학생총회의 날을 택했다. ‘많이 왔을까’라는 의문 속에 취재를 위해 달려간 학생주차장은 소집을 10분 남긴 5시 50분임에도 빈자리가 대부분이었다. 자리마다 놓아져 있던 우비는 대부분 제 주인을 찾지 못했다. 제48대 ‘SODA’ 총학생회 학생회장 박상연 씨는 우산과 우비 없이 비를 맞아가며 학생총회 소집 참가를 호소했고 학생 실천단 ‘이것이 민주주의다(이하 이.민.주.)의 단원들은 학생주차장 주위를 분주히 오가며 박근혜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피켓을 나눠주고 자리를 정리했다. 

본교 학생들만 학생총회를 지켜본 것은 아니었다. 학생주차장의 인도에는 본교 여러 교수들이 학생총회 소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교수회 윤재석 의장에게 학생총회를 보는 소감을 물었다. 윤 의장은 “박근혜 정권 퇴진에 관한 건에 대한 학생들의 행동에 공감한다”며 “이런 열기로 촛불이 모이면 청와대를 불사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총회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한 외국인 대학원생이 있었다. 법대에 있다 큰소리에 궁금해져 내려왔다는 그는 학생총회가 진행되는 모습 자체가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또한 학생총회 맨 앞자리에는 동국대학교 총학생회장 강수현 씨가 자리했었다. 경북대학교 학생총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묻자 강 학생회장은 “학생총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 대구·경북지역 대학과도 같이 연계를 하기 위해 참석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다양한 이들의 관심 속에 학생총회는 준비되고 있었다. 

6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부터 학과의 깃발을 앞세우고 학과 단위의 참가학생이 속속 도착을 해 어느 정도 대회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2,500석의 의자, 정족수 2,161명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6시 25분 개회에 실패했음을 선언했다. 설마설마 하던 상황이 현실이 됐다. 연단에서 선언하는 박 회장과 피켓을 돌리던 이.민.주. 단원은 물론 자리에 앉은 학생들까지 굳은 얼굴을 보였다. 박 회장은 무릎을 꿇었고 학생들은 괜찮다는 위로 밖에 보낼 수 없었다. 

식어버린 분위기가 뜨겁게 타오를 때는 총장의 발표 때였다. 총장이 얼굴을 보인 순간부터 인사하고 내려갈 때까지 “2등 총장 인정 못해!”, “내려가!”라는 구호가 울렸다. 하지만 거기까지 일 수밖에 없었다. 성사되지 않았기에 의결은 없었다. 그 후 박 회장이 올라오자 또 하나의 호령이 울렸다. “총학 이거 뭐하는 거야?” 총장을 학생총회에 불러 발언 기회를 준 것에 대한 교수의 항의였다. 

이뤄지지 않았기에 이룬게 없던 금요일 경북대의 저녁이었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은 또 하나의 시국대회로만 이루어졌고 총장의 답변 발표에 소리를 질렀을 뿐 경북대 학생의 이름을 내건 결의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니 만들 수 없었다. 

학생총회 역사

1980년, 1회 학생총회 성사

‘민주화의 진통, 자유의 산고인 현시국을 냉철한 지성의 눈으로 파악, 최선의 대처방안을 모색하려는 본회는 열띤 의견발표로 시종 갈채 속에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1980년 5월 9일 오전 10시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 1회 학생총회가 성사되었을 당시의 기사이다. 당시 학생총회는 5천여 명이 참가한 채 이루어졌으며 10여 명이 시국에 대해 각자의 의견 발표를 가졌다. 발표의 주요 내용은 ▲비상계엄 해제의 근거 ▲이원적 집정부제의 허구성 등이었다. 이날 학생들은 회의에서 시국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10일 현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본교의 역사와 함께 걸어온 학생총회

1991년 5월 8일, 비상학생총회가 열린다. 이것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명지대 학생들은 자주화 활동을 하다 경찰에 연행된 총학생회장의 즉시 석방과 등록금 인하 시위를 열어 학교 밖으로 진출, 가두를 점거하여 투쟁했다. 이때 명지대 1학년 강경대는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구타당하여 사망한다. 이로 인해 범시민연대적 규탄투쟁이 시내 곳곳에서 가열차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안영민 총학생회장이 학생총회를 긴급제안한다. 이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와 행동을 함께하여 정세 주도권 확보를 위한 토대 구축 및 전국적 동맹휴업을 실시했으며 안 총학생회장이 의장이었던 대구경북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차원의 활동도 계속 전개했다.

1994년 4월 7일에 열린 학생총회에서는 쌀 및 기초농산물 수입개방을 반대하며 복현대개혁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안건은 ▲쌀 및 기초농산물 수입개방에 관한 이만학우 의사개진운동 총화 ▲복현대개혁 : 교육시장 개방 반대, 국가를 대상으로 교육재정 확보, 교과과정 전면 검토, 강의평가제 실시를 통해 교육내용 혁신, 전 구성원이 합의하는 복현의 장기적 계획안과 총장 선출 등으로 상정되었다. 

1998년 4월 9일 소집된 학생총회는 2천여 명이 참가하며 정족수 미달로 불발된다. 해당 학생총회의 안건은 ▲통일열사 추모제 및 추모비 재건립 ▲학부제 재논의로 진행됐다. 

1994년, 1998년도의 총회를 살펴보면, 이전까지 대학생 지식인이 직면한 정치적·사회적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됐던 학생총회가 이때 이후로 학생들이 본부와의 소통을 시도하여 본인들의 요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적 형태의 총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2년 3월 20일 오후 3시에 소집된 학생총회가 11년 만에 성사되었다. 등록금 기성회비가 8% 인상되어 총학생회는 이에 대한 투쟁의 일환이자 기성회비 조정협의회의 학생 심의·의결권 보장을 의결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한 것이다. 총회가 진행되며 본부 측이 내놓은 중재안을 거절하고 새로운 중재안 또한 거절하며 동결 이외의 다른 안은 전부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본부와의 치열한 협의 끝에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다음날 새벽 4시에 폐회한다.

이후 2005년 소집 예정이었고 2007년과 2008년, 2012년에 소집된 학생총회는 모두 등록금(기성회비)의 인상에 반발하거나 등록금 인하를 촉구하는 움직임으로써 전개됐다. 하지만 2005년에는 소집이 무산되고 이후 2007년도, 2008년도, 2012년도에는 정족수 미달로 불발된다. 2007년과 2010년에는 국립대 법인화 반대 및 본관의 대응방안의 공개를 촉구하는 안건에 대해 논의·의결하고자 했으나 마찬가지로 2010년도 학생총회도 불발된다.

2012년도에는 ▲기성회비 부당사용분 반환 ▲등록금 인하 이외에 ▲GP 내 학생공간 확보 ▲교육재정 GDP 대비 7%(OECD 평균)로 확충 등 4 대 안건과 ▲기성회 이사회 제도 개선 ▲BTL 기숙사 계약내용 공개 ▲ABEEK제도 완화 및 개선에 대해 논의·의결하고자 했다. 비록 불발했지만 기성회비 반환청구 소송인단 모집에는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의 학생총회

2002년 학생총회 성사 이후 네 번의 거듭된 불발로 학생의 총의를 모으는 데 난항을 겪은 총학생회는 2013년 1월 임시전교학생대표자회의(이하 임시전학대회)를 개최해 학생회칙 개정을 통한 개회 요건 완화에 나선다. 이로 인해 학생총회 개회 요건이 학생회 회원의 4,000명 이상의 참석에서 학생회 회원 10분의 1 이상의 참석으로 변경됐다.

회칙 개정 이후 소집된 2013년 4월 2일 학생총회에는 회칙 개정만이 성사의 이유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학생이 모여 정족수 2400명을 훌쩍 넘긴 4,800명이 참석했다. 총회 이전 3월 20일 열린 임시전학대회에서 학생총회 개최 안건이 통과됨에 따라 실질적으로 본부와 협상을 준비하는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가 꾸려졌다. 논의 안건은 크게 네 가지로 ▲안전 분야 ▲복지 분야 (BTL 등) ▲교육권 분야 (등록금심의위원회 등) ▲상주캠퍼스 분야 등으로 계획됐다. 

2014년 4월 8일 소집된 학생총회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회의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열린 학생총회’라는 명칭과 ‘잠금 해제’라는 콘셉트를 가졌다. 논의 안건으로는 ▲총장 선출 규정에 학생 비율 확대 ▲한마음 대제전 저지 ▲2차 BTL 문제 ▲학사제도 개편 과정을 계획했다. 의제가 통과된 후 19시경 학생대표들은 학생처장실에서 학생처장, 학생부처장, 학생과장과 협의를 시작해 긴 시간 대화를 통해 23시 50분경 협의문을 작성했다. 해당 총회 이후 본부는 총회 한 달 이후 5월에 답변을 딱 한 차례 전달했고 이후 총학생회가 8월에 다시 한 번 공문을 요청했지만 두 달 째 묵묵부답인 등의 모습을 보여 본부의 미온적 태도가 문제시되기도 했다. 

이번 총회의 준비에 있어 과거 주로 총학생회의 주도로 임시전학대회를 통해 총회 소집의 안건을 상정해 과반수의 찬성이 있을 시 소집했던 것과는 달리 회원 5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소집 요건을 충족했다는 점이 차이점으로 꼽힌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학생실천단의 총회를 위한 서명운동이 있기 전에 학생총회를 개최하고자 하는 의향은 없었는지에 대해 이번 학생총회의 의장을 맡은 제48대 ‘SODA’ 총학생회장 박상연(사범대 물리교육 10) 씨는 “선거기간이고 모든 대표자들이 교체되는 시점이라 과거 학생총회 소집 요건대로 하기 힘들었다”며 “학생들의 직접적 연서명을 통해 학생총회를 발의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또 1994년, 1998년도 이후 학생들의 총의를 모아 학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본관과의 직접적 소통 창구로 이용되었던 학생총회가 다시금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학생들의 목소리를 내는 형식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눈에 띈다. 

김나영 기자/kny15@knu.ac.kr

김민호 기자/kmh16@knu.ac.kr

사진: 김서현 기자/ksh15@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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