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게발붓을 바라보는 이인훈 장인의 진중한 모습.

‘삼우당 필방’의 홈페이지에 적힌 주소를 속으로 읊으며 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평범한 가정집과 똑같이 생긴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자, 그곳은 서로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수많은 전통붓들의 터전이었다. 붓을 이루는 축(軸)·수(穗)·초(?) 각 세 부분이 전부 다르게 생긴 붓들이 각자의 모습을 뽐내고 있지만, 언뜻 보아 똑같이 생긴 붓 또한 ‘같은’ 붓은 아니다.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 모필장 필원 이인훈(71) 선생은 “사람의 머리카락이 사람마다 전부 다르듯이, 짐승도 50마리를 잡으면 색깔이 다르고 부드럽고 억세고 굵고 가는 것이 전부 달라. 여기서부터 차이가 나는거야. 각 털에 맞게 제작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 게다가 기계가 아닌 사람 손으로 만드니까 같을 수가 없는 거야.”라 말했다. 그는 이어 “사람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고, 붓도 똑같아. 사람마다 맞는 붓이 따로 있지”라고 말했다. 전통붓의 세계에 ‘같은 붓’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우리의 전통적인 서사도구인 붓은 선비의 네 벗인 문방사우(文房四友)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전통붓 중 황모필(黃毛, 족제비의 털)은 중국의 문헌에 소개되어있을 정도로 그 품질이 유명했다. 황모필 이외에는 청모필(靑毛, 날다람쥐의 털), 장액필(獐腋, 노루의 털) 등이 전통붓으로 손꼽힌다. 앞에서 말한 황모필, 청모필, 장액필을 만드는 모필장은 현재 전국적으로 대구무형문화재 필원 이인훈 모필장밖에 없다. 그는 한·중·일을 통틀어 유일하게 붓털을 3겹으로 만드는 전통기술을 사용한다. 이는 속에 심이 있고 중간에 심이 또 있어 붓의 힘이 강하다. 중국과 일본은 2겹 붓을 사용해 일본으로 그의 붓이 많이 수출됐다.

그의 모필 작품은 태왕사신기, 미인도, 바람의 화원, 인사동 스캔들 등의 영화, 드라마를 통해 화면상으로 이미 대중들과 만난 바 있으며 故 노무현 대통령, 前 전두환 대통령, 前 이명박 대통령 등이 그의 모필을 소장하고 있기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본인이 만든 붓에 50% 이상 만족한 적이 없다 말했다. 그는 “조금 나은 건 ‘아, 이건 괜찮다’라는 것들이 있을 수 있어. 하지만 거기에 내가 80%니 100% 만족한다고 할 수가 없어”라고 말했다.

‘부족한 것이 더욱 인간미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 모필장은 “우리(모필장)가 얘기할 때는 100%라는 건 없어. 70%만 해도 상당히 만족한 것이라는 거야. 이번에 조금 더 잘할 수 있고 조금 더 못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붓을 사가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붓의 점수를 매기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 붓을 평하지는 못해”라고 말했다.

그는 3대째 모필 제작의 가업을 잇고 있다. 그의 막내아들 이석현 씨가 그를 이어 4대째 가업을 잇기 위해 전수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이 모필장은 “할아버지 때부터 모필 제작을 하시고 아버지 때 하시고. 그때만해도 삼우당의 종업원이 50명이나 되었어. 그러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셨고 가세가 기울었던 거야. 그때 내 나이 17살에 부모님을 돕기 위해 모필 제작에 입문을 하게 됐지”라 말했다. 그는 이어 “다른 길이 가고 싶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 어린 마음에 더 좋은 거 하고 싶었지. 그래도 6남매 아들 5형제 맏이였어, 내가. 항상 아버지가 대를 이어야 한다고 하셨던 거야. 어릴 적에 집에 있으면 아버지가 붓 만드는 거 어깨너머로 배웠지. 대충 보고 배웠으니 처음 하는 사람들보다 빨리 습득했어”라고 말했다. “올해로 54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니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했지. 대구에 나 하나밖에 없지. 다섯 사람 있었는데 지금은 다들 문 닫고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는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많이 힘들지. 지금까지도 힘들지. 무형문화재라는 사람으로서 공방 지어서 작품 걸고 관광객들한테 작품 팔고 그렇게 하고 싶은데 안 힘들면 이렇게 아파트에 지내겠어. 어렵지 뭐…”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워도 남 부럽지 않다’고 덧붙였다. “내가 만들어서 내가 먹고 사니까. 적으면 적은대로 먹고 살고. 장사 좀 될 때는 못 사 먹던 거 사 먹고. 마음은 편한 거야. 그냥 나는 서예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내 붓을 인정을 해줄 때 그게 좋은 거야. 다들 ‘아이고, 선생님. 아프시면 우리가 작품 못하니까 눈하고 손만 고장 안 나면 되니까. 선생님 건강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는 대구시의 지원이 많이 아쉽다고 했다. “일본에는 자체적으로 공방을 완벽하게 마련해주고, 전라도에서도 판매가 가능한 작업장을 만들어줘서 관광객들이 구경하고 필요한 거 사서 가도록 말이야. 안동 하회마을처럼. 근데 대구만 없는 거야” 그는 이어 “무형문화재 지정받은 분들이 지금 살기가 다 어려워. 그래서 이번 대구 시장이 딴 지역만큼은 연금을 해주겠다 얘기를 했고, 지금 실천을 위해 움직여주고 있는 중이지. 아직 체계는 안 잡혔지만”이라며 그는 이러한 지원이 전통의 맥을 잇는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작품을 하기가 힘들어. 이렇게 여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도 전통이 없어지지. 다 직접 손으로 안 만들고 기계로 할라카지” 실제 한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붓들 중 90%가 중국산 붓이라고 그는 말했다. 국내에서 제작할 인건비가 안 되니 중국에서 수입해오는 것이다.

그의 전통붓 제작의 과정은 총 37가지이나, 크게 ▲동물을 구입해 털을 뽑는다 ▲뽑은 털을 빗질한다 ▲볏짚 태운 잿가루를 털 위에 뿌리고 신문지로 말아 다림질해 기름을 제거한다 ▲털을 섞어 끝을 모아 ‘나쁜 털’을 제거한다 ▲재단한다 ▲물에 넣어서 털이 거꾸로 된 것을 골라 제거한다 ▲밀가루를 묻힌다 등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한 자루의 붓을 만드는 데 150번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재료가 좋아야하고 ▲기름을 잘 빼야하고 ▲뭉툭한 끝을 뾰족하게 잘 재단해야 하며 ▲물에 넣어서 털이 거꾸로 된 것을 골라내야하는 것 이 네 가지를 강조했다. 

좋은 재료에 대해서 그는 “과거에는 강원도 목포에서 잡은 동물의 털을 많이 사용했으나 온난화현상으로 인해 현재는 중국, 몽골, 러시아에서 수입해오게 됐지”라며 “동물들은 봄이 되면 나쁜 털은 다 빠져버리고 좋은 털만 가지고 있게 되는 털갈이를 하는데 이 때문에 12월 지나서 3월까지 재료 구입을 해야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1월과 3월 사이에 잡은 재료가 가장 좋고 이 기간을 지나서 잡으면 재료가 2~3등품까지 가치가 떨어지며 붓이 옳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재료를 구입할 때는 넉넉히 1~3년 쓸 것으로 준비한다. 그는 중국, 몽골 등지에서 재료를 구입하더라도 통역을 동반해 직접 해당 지역을 방문하여 재료를 확인하고 구매한다. 전수 조교로 활동하고 있는 막내아들 이석현 씨도 이에 동행하곤 한다.

그는 “털로 만드는 건 뭐든 해달라는 건 다 해주지”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가 만들었던 붓 중 100마리의 말의 꼬리로 만들어 65kg에 육박하는 커다란 붓은 유명하다. 또 그는 호랑이 털을 한 가닥 한 가닥 그리지 않고 한 획에 여러 가닥을 그리고 싶다는 화가에게 이가 가능한 붓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 같은 기술을 보유한 모필장은 한국에 그가 유일하다. 어느 날 두 팔이 없는 사람이 그에게 입에 붓을 물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붓을 만들어달라 부탁했고, 그는 그를 위해 붓을 특수 제작해주었다. 그는 “입술 선을 세심하게 그릴 수 있는 화장솔도 집사람에게 만들어줬지”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가 만드는 붓들 중 특이한 재료를 사용하는 붓이 몇 가지 있다. 바로 아기의 배냇머리를 이용해 붓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때 사대부 집안에서 배냇머리로 붓을 만들어 혼수함에 넣어 시집, 장가를 보내면 오래 살고 머리가 좋아진다는 전래가 있다. 그는 “그때는 돈 없는 사람은 못 만들었지”라고 말했다. 현대에는 아기의 몸무게, 키와 부모님의 성함을 함께 적은 액자에 배냇머리로 만든 붓을 전시하여 백일 돌 때 선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는 한 업체와 연계하여 액자 제작은 해당 업체에서 진행하고 붓 제작만 담당해주고 있다. 그는 “인터넷으로 판매하고 있어 일본, 미국 등지에서도 주문이 들어오는거야”라며 “끝부분이 짤리면 안 되기 때문에 자른 적이 있는 성인의 머리카락은 안 되고 뱃속 머리여야 하지”라고 말했다. “백일 때나 돌 때 그때 머리를 깎아서 제작하지. 평생의 가보(家寶)지. 자기가 가지고 다녀야 하는” 

꿩털 등 새털으로 만든 붓은 먹물이 다 묻지 않는다. 반밖에 묻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새털에는 물방울 떨어트리면 툭 굴러지잖아. 그래서 새털로 만든 붓들은 보통 전시를 위해 만드는 특수 작품이지. 닭털 같은 건”이라며 “저걸로 칠하면 물감이 둑둑 떨어져서 묻는 데는 묻고 안 묻는 데는 안 묻고 이러거든”이라 말했다. 

그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전통을 때 안 묻고 그대로 맥을 이어주는 것이 목표지. 딴 거 어딨노. 그게 꿈이지 뭐 내 나이 칠십하나에 다른 꿈이 뭐 있겠냐는거야”라며 “아들에게도 항상 아버지 하는 대로 배운 뒤에 개인적으로도 연구를 해서 우리나라 전통을 더 잘 만들도록 하라고 말하지”라고 말했다. 그는 또 대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없냐는 질문에 대해 “앞으로 대학생들도 직장 다니다가 정년퇴직하고 나면 서예나 그림을 해야 할 거란 말이야. 학교 다닐 때 학업도 좋지만 서예 계통의 책을 사서 한 번씩 보고. 이런 전통도 있다는 것을 조금 조금씩 익히는 게 좋지. 잘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내 손에 이렇게 정성이 담겨있다는 것을 느끼는 거야”라고 말했다.

글, 사진 : 김나영 기자/kny15@knu.ac.kr

사진 : 김서현 기자/ksh15@knu.ac.kr

▲ 알록달록 아름다운 붓들이 붓걸이에 나란히 걸려있다. 이인훈 모필장은 붓대 또한 직접 디자인하여 업체에 제작을 맡긴다.

▲ 삼동필(三同筆). 하나의 자루 속에 크기가 다른 붓이 세 자루 들어가 있다. 옛날 선비들이 이렇게 가지고 다녔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이인훈 모필장만 제작하는 붓이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 주인공 신윤복(문근영)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붓이기도 하다.

▲ 붓 제작 과정 중 ‘나쁜 털’을 제거하는 빗질. 해당 빗질을 ‘나쁜 털’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50번 이상 반복한다고 한다.

▲ 우리나라 전통 붓 황모필 중 최고 가는 붓. 이인훈 모필장은 “흰 데 안 놓으면 잘 안 보여”하며 웃었다. 한복, 악세사리 브로치 등의 나비를 그릴 때 나비의 눈과 날개를 그리는 용도로 쓰인다.

▲ 붓이 갖춰야 할 네 가지 미덕인 첨제원건(尖齊圓健)을 모두 만족하는 듯한 모양의 붓들. 첨제원건은 붓 끝이 뾰족해야하고, 터럭이 가지런해야 하며, 먹물을 풍부하게 머금어야 하며 적당한 탄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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