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의 난해한 주제였던 ‘신의 존재증명’은 지금의 한국사회를 가만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해결된다. 수많은 신(神)들의 전성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의 존재증명은 더 이상 무겁고 어려운 철학이나 신학의 주제로 취급되지 않는다. 일상매체를 통해서 언제나 신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컬의 신, 요리의 신, 직장의 신, 공부의 신, 야구의 신, 심지어 몸신까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이토록 다양한 신들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나라가 다신교의 지배를 받는 신정국가는 아닌가? 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한다. 

카프카의 소설「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가 갑자기 흉측한 벌레로 변했다는 난해한 문학적 문제 또한 지금의 한국사회를 가만히 살펴보는 것만으로 손쉽게 해결된다. 수많은 충(蟲)들의 전성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이야기는 더 이상 실존주의 문학의 난해한 주제로만 취급되지 않는다. 우리의 생활영역 속에서 언제나 충이 된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베충, 개독충, 급식충, 종북충, 좌좀충, 우꼴충, 맘충…….  

굳이 “인류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의 거창한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역사와 오늘 속에서 끊임없이 인간의 계층(혹은 계급)구분을 시도하였고, 또 그것을 합리화하면서 부의 차등적 분배를 정당화시켜왔다. 인도의 카스트제도, 신라시대의 골품제도, 조선시대의 양천제 등 인간의 계층구분은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지배의 강력한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계층구분이 지니는 장구한 역사성을 감안하더라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나타나는 인간구분은 과거의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극단의 양상을 보인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배자-피지배자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인간의 계층구분을 전제한다면 지배자가 스스로 신(神)이 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흔한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루이14세도 자신을 국가라고 했지, 감히 신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한편 조선시대의 백정이나 카스트제도의 수드라 등과 같은 피지배자들은 어디까지나 천민이라는 사람이었지, 그들은 결코 벌레(蟲)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의 계층구분은 인간이 인간을 구분 짓는 가장 저열한 방식의 극한을 나타내고 있다. 소수의 지배적 신과 다수의 피지배적 충이라는 인간구분이 그 극한값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인간’을 구분하는 일에 신과 벌레가 동원되는 ‘충신(蟲神)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되고, 벌레로 명칭 되는 극단의 시대는 도대체 무엇의 연유함인가?

여러 가능성 중에서 필자는 자본주의를 지속해야만 하는 물신(物神)의 처절한 생존전략이 지금의 한국사회를 충신의 시대로 만든 주범이 아닐까 생각한다. 끊임없이 이윤을 증식해야만 그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자본주의는, 사실 무던히도 피곤한 지배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 스스로가 무한한 이윤증식 앞에서 극단의 피로를 느낄 때, 자본은 물신(物神)이라는 자신의 신적지위를 일정부분 양도해버리는 것이다. 누구에게? 우리가 일상매체를 통해서 목격하는 자본획득에 성공한 소수의 신이 된 자들에게! 이처럼 오늘날 ‘신’의 전성시대는 신의 명칭부여를 통해 인간을 또다시 분획하는, 자본의 이윤증식 전략 속의 처절한 맥락이 표면화된 상황일 뿐인 것이다. 

자본이라는 물신이 자신의 소중한 신적 지위를 일부 지배자에게 극적으로 떼어준 만큼, 그것은 다시 극적인 경로를 통해서 반드시 회수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자본의 본질적 속성이기도 하다. 사람이었던 지배자를 신으로 격상시켰던 만큼, 사람이었던 피지배자를 충으로 강등시키는 자본의 극적인 처방. 바로 여기에 우리사회에 각종 충들이 난무하는, 그래서 사람이 벌레(蟲)로 되는 딱한 사정이 있다. 이는 공동체 의식이 미약한 상태에서 천민자본주의의 막강한 힘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계층적 결과이기도 하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n)은 20세기 역사를 ‘극단의 시대’로 묘사한 바 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극단의 더 강화된 버전인 ‘충신(蟲神)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신과 벌레의 이름으로 묘사되는 극적인 상황은, 어쩌면 우리사회의 ‘금수저-흙수저’ 담론이 이미 예정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황금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거처하는 신적인 상상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갑들은(이들은 사람이다) 금수저로 상징되는 신적 지위를 형성시켰고, 흙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의 모습은 다수의 피지배적 을들에게(이들도 사람이다) 흙수저로 환유되는 벌레를 상상 및 접목시켰던 것은 아닐는지…….

우리는 ‘대한충국’(大韓蟲國)이나 ‘대한신국’(大韓神國)에 살고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공동체의 정식국호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다. 국가의 구성원이 벌레도, 신도 아닌 백성인 사람(人民)이라는 뜻이다. 벌레(蟲)는 그저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 속 생명체로, 신(神)은 숭고한 종교적 대상으로 여겨지면 될 뿐, 그것이 굳이 인간을 표상하는 극단의 언어가 될 이유는 없다. 자본의 처절한 기획으로부터 탈피하여 사람으로부터 蟲과 神을 떼어내고, 사람이 그 자체로서 존중되는 그런 시대를 기획하는 자. 그는 蟲神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진정한 忠臣일 것이다.    

정재요

(대학원 정치학 박사)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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