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70주년을 맞은 ‘10월항쟁’. 대구에서 시작된 10월항쟁은 전국으로 번져나간 민중항쟁 중 하나다. 1946년에 계속된 공출과 미곡수집령 등 식량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민중은 생존권을 걸고 9월총파업을 일으켰다. 이후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노동자들은 민중항쟁을 일으켰다. 10월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살기 위해 일으킨 항쟁은 유혈사태로 번져, 긴 시간 동안 무수한 희생자들을 낳고 역사 속의 한 장으로 남았다. 오늘날 대구는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10월항쟁 70년 시민추모제(이하 시민추모제) 현장과 ‘10월항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이하 유족회)’ 모임에 직접 찾아가 2016년의 시점에서 1946년 10월 1일을 되돌아봤다● 

인파 속에서 어우러지는 

시민추모제

지난 1일 2.28기념 중앙공원 청소년광장에서 진행된 10월항쟁 시민추모제는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진행됐다. 유족회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대구지부, 대구경북 추모연대, 청년 유니온 등 다양한 단체에서 온 사람들이 자리를 지켰다. 근처를 지나던 시민들도 빈자리를 채우며 추모제를 지켜봤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들이 점점 세게 내려오자 추모제를 주최한 10월항쟁 70년 행사 위원회 측은 흰 우비를 나눠주며 행사를 이끌었다.

이날 행사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1부에는 추모식과 연극, 2부에는 스트릿댄스 및 판소리 등의 다양한 공연이 진행됐다. 또한 문학제를 위해 참석한 문인들의 작품 낭송도 함께 진행됐다. 연극을 위해 무대에 오른 ‘도도 연극과 교육 연구소’의 배우들은 “굶어 죽으란 말이가, 이놈들!”, “밤에 이장이 찾아와가 자꾸만 도장 돌라캐가 찍어줬심더”, “형님, 형님 퍼뜩 오이소” 등 친근한 사투리로 연기를 펼쳤다.

스트릿댄스 공연을 맡은 ‘대구춤판’팀은 ‘Daegu Resistance Street Movement’라는 주제로 역동적인 무대를 준비했다. 대구춤판의 공연에 대해 2부 행사를 진행한 대구경북작가회의 신기훈 씨는 “세대와 세대가 소통하는 좋은 무대였다”고 말했다. ‘어우러지는 것’, 10월항쟁 70년 행사 위원회는 서로 소통하는 것에 행사의 초점을 맞췄다. 유족회 채영희 회장은 “매년 대구 시내의 여러 시민단체와 유족회가 연대해서 추모제를 진행한다”며 “‘시민’이라는 말이 붙는 만큼 일반 시민들에게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시내 한가운데, 유동인구가 많은 2.28기념 중앙공원을 매년 추모제 장소로 선정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연극을 하던 배우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달리는 장면을 연기할 때였다. 사진을 찍던 기자의 뒤에서 한 노인이 일행에게 “저때 저런 거 고마 다 뺄개이(빨갱이) 아니가?”하고 물었다. 1946년 그 자리에는 정말 ‘뺄개이’가 있었을까?

해방에서 6.25까지의 

유혈사태

10월항쟁의 이름은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바뀐다. 혹자는 단순한 ‘사건’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자는 민중들이 목숨을 걸고 항거했던 ‘항쟁’이라고 하기도 한다. 빨갱이들이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이렇게 보는 사람마다 10월항쟁을 달리 보는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10월항쟁의 배경과 결과에 대해 알아야 한다.

10월항쟁은 해방 직후 미군정의 통치로부터 시작한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10월항쟁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그대로 고용하고 강압적인 식량 공출을 시행하자,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행정에 맞서며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미군정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1946년 9월 전국적으로 총파업을 일으켰고, 경찰의 발포로 시위군중 중 사망자가 나오며 10월항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이다.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은 그해 12월까지 남한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후 지도자 자리에 앉은 이승만 정권은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을 결성해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통제관리했다. 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에 동조할 위험이 있는 불순 세력을 모두 처리한다’는 명목 하에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현대에도 다각도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 9월 『10월 항쟁(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을 출판한 김상숙 작가는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은 1946년 10월항쟁이 원인이 된 경우가 많았다”며 “이는 한 세대 사회운동의 절멸을 의미했으며, 국가 권력의 토대를 강화하는 폭력적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경찰국가 동원 세력의 피해도 발생했다. 군중들에게 습격당해 폭행을 당하거나 살해당한 군경찰의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피학살자 전국 유족회’가 추산한 피학살자 수가 무려 113만여 명에 달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국가 폭력에 의해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대거 희생당한 부분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채영희 유족회장은 “80년대에 연좌제가 폐지됐음에도 유가족들은 뺄개이 마누라, 뺄개이 자식이라는 주홍글씨를 이마에 달고 죽은 듯 눌려 살았다”고 말한다. 얼마 전 유족회의 회원이 된 정철규 씨도 도청 고위직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잃은 경험이 있다. 그는 “어머니가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과 괄시를 피하기 위해 피난민들 사이에 섞여 살 것을 결심하셨다”며 “부산으로 도망치듯 내려가 정말 힘들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현재 유족회에는 60여 명의 유족 중 40명이 서명 운동을 하고 추모 행사를 진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유족회 총무 박종경(이하 박) 씨와 사무국장 이일영(이하 이) 씨를 만나 유족의 입장에서 보는 10월항쟁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 :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해방 후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당시 경성제국대학, 지금의 서울대인 학교에 입학하려고 동네 청년들끼리 모여 공부를 했어요. 그러던 중 누군가 여기 이름 적어라 하는 걸 그냥 적어줬지요. 그게 보도연맹까지 간 거예요. 그래서 10월항쟁이 한창 있고난 후에, 6.25 전쟁이 터진 후 1950년 7월 즈음에 경찰이 찾아와 데려가고 나선 다시 못 오셨어요.

이 : 우리 형님은 (대구사범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구 10월항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다 대구사범학교에 안치해 놓았다고 해요. 당시 학생이었던 형님이 무엇을 알겠어요…. 그런데도 형님을 김천 소년형무소로 끌고 갔죠. 어머니가 어린 저를 업고 면회를 다니셨어요. 당시엔 매스컴도 발달하지 않았고 하니 김천 쪽에서 오는 사람에게 수소문해서 소식을 묻곤 했지요. 

박 :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는데, 어머니 혼자 농사 조금 지어 장에 내다 팔고 하며 어렵게 살았어요. 어렸을 때는 왜 나는 아버지가 없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함구하셨거든요. 하도 빨갱이, 빨갱이 하면서 사람 취급을 안 하던 때여서 그러셨던 것 같아요. 큰집이 다 교육공무원을 하셨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피해를 볼까봐 호적을 싹 정리할 정도였어요.

이 : 우리 어머니는 화병을 앓으셨어요.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고요. 억울하게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은 평생 치유가 안 되지요. 형님이 끌려가셨을 적에 집안 사람들은 다들 착하고 어린 학생이 무슨 죄가 있어서 빨갱이냐고, 아무 죄도 없으니 당연히 금방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나면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죠.

박 : 2009년에 유족회가 생기자마자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유족회에서 하는 일이 많아요. 유가족에 대한 배보상과 유해 발굴 및 지역단위 추모공원 조성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운동도 하고, 이에 대한 서명을 받으러도 다니고, 6.25 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들의 위령제도 지냅니다. 그러다보면 경비가 상당히 많이 들어 회비가 늘 부족하더라고요. 한 회원의 1년 회비가 30만 원인데도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이 : 저는 2년 전 친구를 통해 유족회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서명 운동을 많이 하러 갔는데,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크게 가져주지 않아서 어려웠어요. 한 번은 영남대 학생들 세 명이 지나가다가 와서 서명 운동을 도와준 적이 있는데, 정말 고맙고 좋았죠. 10월항쟁과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젊은 사람들도 많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박 : 10월항쟁은 해방 이후 사람답게 살기 위해 투쟁하다가 국가하고 마찰이 생긴 일이에요. 당시 흉년이 계속 되고 먹을 것은 없어서 정말 살기 어려웠다고 해요. 그래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던 건데, 요즘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져서인지 불의에 앞장서 항거하는 젊은 사람들도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10월항쟁의 정신이 현대에도 계승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 민간 피해자들의 유해를 꼭 되찾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현재 유족회의 목표입니다. 대학생들도 이런 근대사에 대해 더 자세히 공부해주었으면 하고요. 깊이 있는 공부까진 아니더라도 그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항쟁이 있었구나. 이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10월항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채영희 유족회장, 정철규 회원, 이일영 사무국장, 박종경 총무이다.

글, 사진: 조현영 기자/jhy16@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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