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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30평(100㎡) 한옥에서 살아난‘지역시인’ 이육사

일제강점기 시기, 탄압에 굴하지 않고 민족의 목소리를 낸 이들이 있다. 그 방법을 문학 작품, 그중에서도 시로 선택한 사람들을 일컬어 ‘저항시인’이라고 한다. 대구에도 많은 저항시인들이 거쳐 갔으며, 이육사도 그중 한 명이다. 시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저항정신을 말한 이육사의 고향은 안동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육사’라는 인물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곳이 있다. 바로 대구다●


▲‘264 작은문학관’ 외관. 나무가 비에 젖어서 더 진한 빛을 낸다.



골목 속 작은 문화공간, 한번 찾아보세요


청사초롱이 머무는 곳, 강의가 시작되다.
지난 8월 27일 저녁시간, 호롱불을 들고 대구의 명소를 돌아다니는 ‘대구야행’이 동성로에서 진행됐다. 거리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와 동시에 대안성당 옆에 있는 작은 한옥, ‘264 작은문학관’에서는 ‘청년 이육사, 대구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문학관 관장인 본교 박현수 교수(인문대 국어국문)의 강연이 열렸다. 박 관장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구에서 머물렀던 이육사의 삶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육사는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그의 형제들은 모두 항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내외에서 투옥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다. 이원록은 이육사의 주민등록등본에 등록돼 있는 이름이다. 이원삼으로도 불렸다. 박 관장은 “이육사의 집에서는 사투리로 ‘원샘이’, ‘원샘이’ 하고 불렀다고 한다”고 말했다.
박 관장은 이육사(二六四)라는 이름도 언급했다. 이육사는 일제가 붙여준 수인번호다. 그래서 이육사 자신도 이 이름이 달갑지 않았는지, 이 이름을 ‘비꼬는 용도’로 사용했다. 이름의 음은 똑같이 하되, 부정적인 의미의 한자를 붙인 것이다. 肉使(육사, 고기먹고 설사한다)가 그런 예다. 하지만 이후에는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때 수인번호였던 이육사를 필명에 그대로 쓰기도 했다.


골목 속에 숨어있는 이육사, 대구 ‘264 작은문학관’
‘264 작은문학관’은 대구에서 15년간 살았던 이육사의 활동과 그 흔적을 담아둔 곳이다. 경상감영공원역에서 내려 골목 이곳저곳을 거쳐서야 비로소 밝은 톤의 나무로 지어진 아담한 건물이 나타났다. 찾기 힘들고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들어가자마자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문학관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전시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한 층이 15평 남짓이다. 1층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치 주방을 연상시키는 카운터가 있었다. 문학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스쿠터만 한 크기의 작은 카페도 있었다.
여닫이 문과 미닫이 문 하나를 통과해 들어가면 기획전시관이 있다. 기획전시관은 박현수 관장이 쓴 논문 「육사 시에 끼친 주자학적 영향」을 비롯해 이육사와 관련된 논문과 시집, 이육사의 작품이 나오는 수능 문제들로 채워져 있었다. 수능 문제를 잘 풀어가면 박 관장이 청포도사탕을 주기도 한다. 박 관장은 “지금은 이육사를 주제로 전시하고 있지만, 다른 대구 시인의 전시도 기획해 이곳에서 선보일 예정이다”고 말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난간에는 작은 글씨로 이육사 생애의 순간순간이 적혀 있었다. 계단을 한 번 올라갈 때마다 이육사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연도와 함께 알 수 있다. 계단 가장 끝 쪽, 즉 마지막 연도인 1944년 ‘북경에서 순국’이라는 글자는 죽은 뒤에도 이 문학관을 통해 계속 살아있는 이육사를 만난다는 느낌을 줬다.
2층의 상설 전시관은 1층보다 더 작아서, 사람이 10명 정도 들어가면 공간이 꽉 찰 것 같았다. 가정집 거실같이 포근한 방의 벽 한 면엔 이육사를 기리기 위한 전시들로 가득했다. 전시관 한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전시물 안내를 위한 책자 ‘264 작은문학관’을 폈다. 책자에서 전시물에 부여된 번호와 일치한 페이지를 보면, 전시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이육사가 살았던 집을 표시한 지도, 이육사가 썼던 엽서와 편지 사진, 시들도 책자에 함께 실려있다.
이어 2층에는 이육사의 가족, 권총을 들고 있는 이육사와 같이 중요한 순간들을 레고블럭으로 표현해 놓은 브릭아트 작품도 있었다. 박 관장은 “관람객들이 이육사가 일제강점기 사람이라 고리타분하게 느낄 것 같아서, 젊은 감각을 살리기 위해 브릭아트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육사의 시 ‘꽃’을 표현한 하이포그래피(서체 디자인)도 있었다. 이 또한 박 관장이 서체를 직접 의뢰해 만들었다고 한다. 전시물을 등지고 돌아서자, 이육사의 시집이 간이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전시관 한쪽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면 바깥이 탁 트여 있다. 그곳에는 포토존이 보이는데, 이육사 시인과 그의 형제들의 벽화가 웃는 얼굴로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이 외에도 전시관에는 이육사를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요소가 많이 녹아 있다. 관람을 위한 책자는 ‘264’페이지이며, 전시물을 서로 연결하기 위한 철줄의 수도 64개이다. 또한 문학관을 짓기 위한 한옥 역시 이육사가 대구에서 활동했던 경상감영공원 근처에 있다.




‘이육사 전문가’ 박현수 관장을 만나다.

▲ 인터뷰 중인 박현수 교수. 왠지 중절모가 잘 어울릴 것 같다.


문학관의 ‘얼굴’
박 관장은 현직 교수이지만, 처음 봤을 땐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신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기자가 사전 취재를 위해 지난 여름에 찾아갔을 때 “여름방학이 끝나면 카운터 관리를 위해 아르바이트생이라도 고용해야 할 것 같다”고 했던 박 관장은 학기가 시작된 뒤에도 여전히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박 관장은 “수업이 없거나 시간이 비면 항상 이곳으로 온다”고 했다.
그는 ‘이육사 전문가’다. 안동 이육사 문학관에서 여러 차례 강연을 하기도 했고, 중국의 CCTV에서 ‘한국의 저항시인’이라는 주제로 ‘264 작은문학관’과 함께 방송에 노출되기도 했다. 그가 이육사를 처음으로 깊게 바라본 건 석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육사 시에 끼친 주자학적 영향’을 쓰면서다. 박현수 관장은 “그때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논문을 쓰려고 형님 차를 얻어 타고 안동까지 갔다가 몇 번이나 길을 헤맸다”며 “이육사 시인이 산 삶을 찾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과 똑같이, 이육사 시인이 살았던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이 길을 찾는 것처럼 어려운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박 관장은 이육사의 삶을 제대로 마주하기 시작했다.


주리론으로 들여다보는 이육사의 시
박 관장은 본인의 논문에서 이육사 시인의 시를 주리론적으로 해석했다. 주리론은 주자학(성리학)의 한 학파로, 객관적인 사실인 ‘기(氣)’ 보다는 그 본질적인 의지인 ‘리(理)’를 더 중요시하는 이론이다. 박 관장은 “퇴계의 주리론은 이육사의 시를 해명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박 관장의 해석에 따르면, ‘꽃’, ‘청포도’, ‘광야’와 같이 그의 기준에서 성공작으로 평가하는 시들은, 이육사의 주리론적 정신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이들 시에는 강인한 의지, 미래에 대한 확신 등이 시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졌다. 하지만 박 관장은 도시의 생활, 사회 현상에 대한 순수한 서정과 같이 즉각적으로 보이는 것 만을 잡아내려고 한 이육사의 작품은 완성도가 떨어졌다고 평가한다. 박 관장은 “단정한 형식과 그에 맞는 의지적이고 품격있는 내용 등이 어우러졌을 때 이육사의 시는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모더니즘 시와 이육사의 시를 비교하기도 했다. 모더니즘은 현상 자체에서 즉각적으로 불러 일으켜지는 서정을 표현하는 창작 경향이다. 박 관장은 정지용과 이육사가 동명의 제목으로 쓴 시 ‘말(馬)’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박 관장은 “이육사 시인의 시는 말을 그린 것 같은데, 끝까지 가보면 대상은 사라지고 뜻만 남아있다”며 “반면에 정지용의 말을 보고 있으면 말의 생김새와 구체적인 생태 같은 걸 가지고 말을 접근하고 쓰고, 말이 가지고 있는 어떤 상징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육사, 그를 설명하는 방법
이육사가 대구에서 많은 활동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육사가 대구에 있던 시기에는 대부분 독립운동을 했고, 많은 시들이 대구에서 창작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그를 ‘대구 시인’으로 부를 수 있을까? 박 관장은 “결론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대구에서 등단했을 뿐만 아니라, 1937년 본적을 완전히 서울로 옮기기 전까지는 대구와 서울을 오갔기 때문이다. 박 관장은 “시인이 꼭 어디 한 곳에 속한 시인일 수는 없다”며 “향촌동 대구문학관에 있는 시인 중에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산 시인은 몇 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육사는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받아, 한 해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유치장을 자주 드나들었지만, 그는 그것을 군소리없이 버텨냈다. 그래서 기자는 “그가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넌지시 물어봤다. 박 관장은 사회학도로서의 이육사를 언급했다. 이육사는 일제강점기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방이 될 것이라고 국제 정세를 판단했고, 그런 확신이 그를 고난에서 이겨내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박 관장은 “그의 시는 늘 *초인을 이야기하고 미래의 밝은 희망을 그리고 있었다”며 “그러한 강인한 생각이 없었던 사람은 결국 일제 말기에 다 친일로 빠졌다”고 했다.


문학관, 시민이 접근하는 문화공간으로
박 관장의 ‘264 작은문학관’은 현재에 멈추지 않고 계속 새로운 것들을 준비하고 있다. 기획전시실에는 이육사 외에도 다른 지역시인들이 ‘초대’될 예정이다. 박 관장은 “‘아미다’라는 브릭아트 작가의 작품을 계속 전시해 볼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문학관은 증축도 진행되고 있다.
박 관장은 문학관을 더 많이 알리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진행하는 ‘문학관 투어’ 가 있다면 함께 공조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박 관장은 “이 문학관이 실질적으로 사회에서 역할을 하려면 시민들과의 연계가 본격적으로 어우러 져야한다”며 “문학관으로 연계를 한정하지 않고, 문학관을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육사의 시 ‘광야’에 나오는 등장인물. 독립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관람 정보

위치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 1길 67-10
관람시간
오후 1시~8시(수~금)
오전 11시 ~ 오후 6시(토, 일)
월, 화 휴무
입장료
어린이(초등학생) 1,000원(개인) 700원(단체)
청소년(고등학생) 1,500원(개인) 1,200원(단체)
성인 2,000원(개인) 1,700(단체)
문의 전화
053-256-2640


글: 이광희 기자/lkh16@knu.ac.kr
사진: 이한솔 기자/lhs15@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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