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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고전 대하소설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학생들에게 현존 최장편 고전소설에 대해 물어보면, 대개 『구운몽』, 『사씨남정기』, 『창선감의록』 중 하나를 답한다. 이때 현대소설로 환산하면 족히 20권이 넘는 작품인 180권 180책의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에 대해 말해주면, 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십 권 혹은 수백 권의 고전소설이 『완월회맹연』 외에도 50여 편이 더 존재한다고 얘기해 주면, 학생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1960년대 이후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서 발굴되어 조명받기 시작했기에 일반인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이들 고전 대하소설은, 현대 대하소설인 『토지』, 『태백산맥』의 할아버지뻘에 해당한다. 대하소설은 조선후기부터 이미 튼실하게 물꼬를 트기 시작하여 현재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으로, 이러한 거질(巨帙)의 소설을 창작해온 저력 속에서 우리 민족의 ‘은근과 끈기’를 엿볼 수 있다.
“인간행락(人間行樂)의 총서”라고 평가받는 고전 대하소설은 마치 큰 강물이 온갖 것을 품고 도저하게 흘러가듯 다양한 인물군상을 바탕으로 삶의 다채로운 모습을 담아낸다. 한 가문의 1대, 2대, 3대를 그린 삼대록 형식(『유씨삼대록』, 『임씨삼대록』 등), 혹은 두서너 개의 가문이 함께 등장하는 가문연합체 형식(『하진양문록』, 『임화정연』 등)을 통해 고전 대하소설은 대서사를 펼쳐나간다.    
이러한 대하소설 가운데는 하나의 작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편후편(『현몽쌍룡기』『조씨삼대록』 등) 혹은 1편2편3편(『명주보월빙』『윤하정삼문취록』『엄씨효문청행록』 등)의 연작소설도 존재한다. 현재도 한 편의 소설 혹은 영화가 인기를 끌면 그 뒤에 계속해서 후속편이 나오듯이, 고전 대하소설도 전편의 인기에 힘입어 후편이 지속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고전 대하소설 다수가 연작인 것은 조선후기 당대 이들 소설의 인기를 입증해 주는데, 세책가(貰冊家)를 통해서도 이러한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도서대여점과 마찬가지로 조선후기에도 돈을 받고 책을 대여해주는 세책가가 존재했다. 영화도 게임도 없던 그 시절, 소설은 당대인들에게 제일 인기가 높았다. 소설을 빌려 보기 위해 집안의 재산을 탕진한 부녀자의 이야기는 그 당시 소설의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고전 대하소설은 세책가에서도 단연 인기가 높았다. 주로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층의 양반들에게 많이 읽혔으며, 낙선재에서 이들 소설이 발견된 데서도 볼 수 있듯이 궁궐에서까지도 향유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하소설을 지은 작가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전소설은 작가가 거의 밝혀지지 않았기에 이들 작품의 작가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옥수기』를 창작한 심능숙(沈能淑)의 예를 통해 볼 수 있듯 작가 또한 독자와 마찬가지로 상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층의 작가들 중에는 여성 작가도 큰 몫을 차지했다. 앞서 소개한 『완월회맹연』의 작가는 전주이씨(1694~1743)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이언경(李彦經)의 딸이자 생원시에 장원한 안개(安?)의 부인이다. 명문 사대부가 여성으로, 『완월회맹연』을 지어 궁중에까지 명성을 드날리고자 하였다. 전주이씨 외에도 『옥원재합기연』, 『십봉기연』, 『비시명감』 등 여러 편의 대하소설을 지은 여성 대작가도 있었으니, 대하소설 작가로서의 여성들의 활약을 족히 짐작할 만하다. 이들은 바로 『토지』의 작가 박경리,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겠다.
상층에서 주로 향유한 이들 대하소설은 하층에서 향유한 『춘향전』 등과는 다른 품격 높은 소설로 평가받았다. 그렇기에 지배이념의 테두리 안에서 충효열(忠孝烈)을 고취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일례로 “달을 구경하면서 함께 모여 잔치를 열어 맹약하다”라는 뜻의 제목을 지닌 『완월회맹연』을 들어보기로 한다. 이 작품은 완월대에서 여러 가문이 모여서 자식들의 혼사를 약속하고 정씨 가문의 적장자를 결정하는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숱한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인해 이러한 맹약들은 깨어질 위기에 처하지만, 주요인물들은 충효열에 바탕하여 시련을 극복하고 결국 맹약을 실현시킨다.   
그런데 대하소설은 단지 봉건적 이념을 공고히 하는 보수적인 내용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중세적 사유의 심원함 속에서 오히려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한두 예를 들어보면, 『명주보월빙』 등에서는 지상과 천상, 전생과 이생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시공간을 통해 ‘지금-여기’에 갇혀 물질적 가치에만 탐닉하는 현대인들에게 고원한 정신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옥원재합기연』 등에서는 타자와 더불어 포월(包越)하는 ‘타자의 서사’를 통해 근대의 ‘주체의 서사’를 넘어서는 탈근대적 담론의 단초를 마련한다. “손자는 할아버지를 닮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근대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고전 대하소설은 폭넓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한편, 고전 대하소설은 문화론적 관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장대한 서사적 흐름 속에서도 일상에 대한 미시적 조명이 탁월하기에, 고전 대하소설은 조선후기의 생활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결혼식 장면이 한 권 전체에 걸쳐 묘사되기도 하는 등 당대의 관혼상제, 놀이문화, 가족담소, 예법 등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섬세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이 중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고전 대하소설 속의 품격 있는 언어와 예법이다.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품격 있는 언어와 예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난잡한 욕설과 은어 등을 사용하며 예절바른 생활과는 멀어져가는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품격 있는 삶의 양식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것도 『명심보감』 등의 딱딱한 교재가 아니라 소설을 통한 감동과 재미 속에서 예법교육까지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고전 대하소설은 큰 의미가 있다.
또한, 고전 대하소설은 문화콘텐츠로서의 활용 가치도 높다. 특히 고전 대하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환상양식들, 예를 들면 여우구렁이 등 천년 묵은 요괴들이 드높은 산 정상 위에 천상 궁궐과 같이 꾸민 도관(道觀), 자신이 원하는 얼굴로 바꿀 수 있는 개용단(改容丹)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미혼단(迷魂丹) 등의 요약(妖藥), 금빛 갑옷을 입은 수천수만 명의 인간들과 온갖 요괴들이 벌이는 일생일대의 대격전 등은 문화콘텐츠로서의 의미가 크다. 오늘날 문화산업이 일종의 화두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면서 열광하는 학생들에게, 고전 대하소설은 서양의 중세적 환타지에 버금갈 동양적 환상양식의 원천소스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이렇게 의미 있는 고전 대하소설이지만, 워낙 방대한 데다가 고어(古語)로 가득한 한글 혹은 한자로 표기되었기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다행히 근래에 『소현성록』, 『유씨삼대록』, 『임씨삼대록』 등 여러 편의 고전 대하소설이 현대어로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고전 대하소설에 관심이 있다면 이러한 번역본을 사서 그 낯설고도 흥미로운 세계로 직접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길연 교수
(사범대 국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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