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이하 기초생활보장제)를 취재하기 위해 만난 익명의 할머니는 감사함이 몸에 밴, 습관과 같이 익숙하신 분이셨다. 6·25 전쟁의 난리를 겪으면서 남편을 잃고 홀로 강원도에서 영천을 거쳐, 대구까지 피신을 와 정착하셨다는 할머니의 삶은 그 시대를 모르는 나에게 낯선 것이었다. 할머니는 정착 후 생활보호법에 의해 수급대상이 되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동사무소는 화재 발생 후 다시 생긴 곳이라 서류가 엉망이었다고 한다. 영세민의 자격으로 수급을 받으러 가셨을 때는 실제 나이보다 10살은 더 젊게 등록돼 있는 상황이었다. 강원도 고향까지 가서 본인 신분을 다시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셨다고 한다. 야박하게도 대신 신청도 해주고 이를 알리는 다른 동장과는 달리 당시 살던 동네의 동장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타지 사람이라 그런 것일까 하며 섭섭해 하시는 모습이 할머니에게서 보였다. 할머니와 같이 계시던 친구 할머니 분이 “이 할머니는 기초생활보장비를 지원받고 나서 한 번도 부족하다고 불평한 적 없고 더 욕심낸 적도 없다”고 하셨다. 정말 그랬다. 인터뷰 중 생활 전반에 대해 어떤 질문을 드려도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것만 해도 괜찮다며, 손님 오면 이렇게 커피 한 잔 줄 수 있는 정도의 사정이지만 이에 감사하다고 하셨다.할머니와의 인터뷰를 주선해 주신 복지사와의 대화 중 그는 “아무리 수급자 분들을 위해 활동을 하려 해도 걸리는 가장 큰 문제는 수급자 본인이다”며, “한 번은 피부암 수술을 받아야 되는 수급자가 있어 담당 복지사가 발로 뛰며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던 적이 있었는데 수급자가 고민 끝에 수술을 고민 끝에 거부하면서 복지사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고 했다. 이외에도 수급자가 부정적인 내적 심리로 인해 스스로 복지사와의 관계에 있어 신뢰를 무너뜨리고 지속적인 관계형성을 어렵게 만든다고 한다. 할머니에게 밑반찬을 배달해주는 복지사는 내 부탁으로 세 명의 수급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었다. 그 중 두 분은 금전적인 댓가를 요구하셨고, 할머니만 아무 조건 없이 허락하셨다. 아마 할머니는 그동안 함께해 준 복지사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응해주셨던 듯하다. 더불어 할머니는 앞으로도 스스로를 걸림돌이 되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인터뷰를 마치고 새삼 ‘감사’라는 것을 되짚어 보게 됐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억지로라도 감사일지를 써야 됐다. 하루에 5개씩 감사한 일을 적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귀찮은 일로 느껴지는 것은 사라지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이 있긴 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는 기본으로 ‘오늘 하루도 고생한 내 발가락에게 감사합니다’, ‘외출증을 써주신 담임 선생님께 감사합니다’처럼 소소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학생들의 발표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감사한 일도 만들면 참 많았었는데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그걸 잃어버린 듯하다. 힘들다는 말만 달고 살았던 지난 1주일을 반성하면서 함께 1시간 동안 감사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신 할머니, 감사합니다.

이한솔기획부 기자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