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에 불그스름한 봉숭아물을 들이는 일은 사소한 즐거움을 준다. 자연염색은 그렇게 고아한 아름다움으로, 또는 우리나라만의 빛깔을 드러내는 전통적 가치로서 우리 곁에 있다. 연재기획 ‘대구 구석구석 박물관’의 마지막, 세 번째로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자연염색박물관’을 찾아갔다. 이 박물관에서는 자연염색 유물과 도구, 섬유관련 민속자료와 국내 자연염색기술 선도자인 김지희 관장의 창작 작품을 볼 수 있다. 또한 천을 곱게 물들이는 체험을 해볼 수도 있다●

자연에 물든 박물관염색은 우연과 자연에 의해 시작됐다. 까마득한 옛날, 누군가는 흰 옷을 입은 채 우거진 숲속을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푸른 풀들이 그의 흰 옷을 스치며 풀물을 옮겼을 그때, 최초의 염색이 시작된 것이다.염색, 말 그대로 빛깔을 물들이는 일이다. 자연염색은 물들이는 재료가 꽃잎, 식물의 줄기, 과일껍질, 심지어 광물에 이르기까지 자연재료(염료 또는 안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게 들리는 말은 ‘천연염색’이다. 박물관의 이름을 ‘천연염색’이 아닌, ‘자연염색’박물관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자연염색박물관’의 김지희 관장(77)은 “자연염색을 연구한 학자들이 천연염색을 제국주의 일본에서 나온 용어라고 봤어요”라고 말했다. 또한 “어원을 살펴보면 ‘천연염색’의 ‘천연’은 타고난 그대로의 물질, 인간의 힘을 가하지 아니한 상태, 야생의, 비예술의, 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용어에요. 반면 ‘자연염색’이라는 용어는 손대지 않은 천연 상태의 것을 인간이 조화롭게 이용해 만들어내는 것, 즉 비예술이 아닌 예술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그렇기에 김 관장은 자연의 곁에서 자연으로 예술을 하기를 바랐다. 그런 뜻에서 자연염색박물관은 도심과는 거리가 먼, 팔공산 한 자락에 자리 잡았다. 본교에서 박물관까지는 버스로 약 1시간이 걸린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담을 두른 박물관이 나오는데, 이 박물관의 담을 따라 넓게 밭이 펼쳐진다. 주요 염색 재료인 홍화와 쪽을 가꾸는 밭이다. 김 관장은 그곳에서 희소한 종자를 들여 보존하고 직접 잎을 따서 염색재료를 만든다. 전통적인 염색 과정은 쉽지 않다. 홍화의 경우, 꽃잎을 절구질해 잘게 찧고 떡을 만들어 햇볕에 바짝 말린다. 그 후 떡에 물을 붓고 면주머니에 넣어 노란 색소를 제거하고, 잿물을 면주머니에 붓고 주물러서야 붉은 색소가 나온다. 볕 좋은 날에 물들인 천을 빨랫줄에 널어 말리면 붉은 옷감을 얻을 수 있다.박물관에 들어서면 수십 가지의 염색재료들을 볼 수 있다. 염색재료는 우리에게 친숙한 강황, 치자, 석류, 쑥 같은 식물이 있는가 하면 도토리, 억새 같은 것도 있다. 또한 보라조개, 소라, 오징어와 같은 어패류나 황토, 주, 군청과 같은 광물성 염료도 있다. 모든 재료에서 선명한 빛깔이 나와 바로 섬유에 물을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개, 소라, 오징어 등의 동물성 염료는 섬유에 직접적인 착색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착색을 돕게 하는 기술인 매염(媒染)처리가 필요하다. 매염의 재료로는 전통적으로 잿물, 명반, 석회가 있다. 김 관장은 “중국은 자연염색 시 잿물을 다 거르지 않고 염색을 하는데, 우리나라는 시간을 들여 잿물을 다 거르고 말간 물만 사용해서 유독 청명하고 우아한 색깔이 납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나라 염색 재료는 대부분 약재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약재는 사계절이 뚜렷해 그 약효가 무척 좋은데, 원래 약효가 좋은 것일수록 색도 맑고 깨끗하게 나오지요. 현대에 흔히 쓰이는 화학염료는 인간에게 너무 해로워요. 반면 자연염색은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매력적인 색깔과 환경 친화적인 제작법으로 만들어져요” 그런데 김 관장은 “염색재료에 대해 공부하면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게서 뺏어간 식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전통 염재 중 하나인 매실도 영어명으로는 ‘Japanese apricot(일본 살구)’이라고 등록돼 있다.

전통은 창조의 시작자연염색에 대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삼한시대에도 존재한다. ‘삼국지 오환선비(烏丸鮮卑) 동이전’에 따르면 ‘누에치는 법을 알아 겸포를 짜서 청색의복을 착용하였으며 청색, 적색, 자색 등의 색실로 문양을 넣어 짠 금직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염색공과 염료공이 일하는 ‘도염서’라는 기관이 존재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자연염색 기술을 고스란히 복원해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김 관장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90세가 넘으신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분들 하시는 말씀을 라디오로 녹음했어요. 그런데 할머니들도 당신들 기술이라고 설명을 잘 안 해줘요. 제가 ‘이렇게 하는 거죠?’라고 물으면 ‘그렇지, 뭐’하고 대답하는 거에요. 그런 한 마디 한 마디씩 모아 집에서 실험하면 몇 독을 실패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얻은 기술을 정리해두면 내게 배우는 사람은 몇 독을 실패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자연염색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김 관장은 “어머니가 염색을 하셨어요”라고 대답했다. 김 관장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남긴 글이 있다.

어머니가 처녀시절/쪽씨, 잇씨 심으셨네딸이 자라. 또 다시/쪽씨, 잇씨 심고서-‘어머니를 생각하며(1979)’ 中

어릴 때부터 김 관장의 내면에 자리한 염색에 대한 애착은 단순히 전통염색을 복원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김 관장은 직접 심은 쪽씨와 잇(홍화)씨를 키워내 전통적인 방법으로 염색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현대적인 감각과 융합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었다. 펠트, 가죽 등 다양한 소재에도 자연염색을 했다. 그리고 단순히 염색을 하는 것이 아닌 부조, 입체, 설치미술에까지 나아갔다. 김 관장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창작예술 전시회를 지속적으로 열었다. 김 관장은 “나의 전통을 찾지 않고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결국 어딘가에 예속돼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교수 정년퇴직 7년 전부터 유물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학생들에게 옛 유물을 직접 보여줘야지 이 색깔을 왜 선택했는지, 색이 바랄 때는 어떤 색인지 공부할 수 있고 유물을 복원도 해볼 수 있거든요. 단순히 인터넷 사진을 보고 모방하는 건 쉬워요. 그러나 유물, 즉 전통에서부터 창작을 시작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해요” 이러한 생각은 박물관을 설립할 때에도 이어졌다. “처음 박물관 설립 때부터 관람객들이 직접 자연염색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장을 크게 만들었어요. 유물을 보기만 하는 건 옛 시대의 박물관이지, 살아 있는 박물관이 아니지요. 요즘 박물관 추세는 대중과 호흡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꿈다락’, ‘길의 인문학’, ‘어르신 문화양성과정’ 등의 프로그램도 무료로 운영해요”

“내 시대에는 적자라도 끝까지 버틸 것이지만…”김 관장은 박물관까지 찾아왔지만 입장료 때문에 돌아서는 이들을 보면서 “‘아직 대구 사람들의 인식이 부족하구나’, ‘우리 유물을 지켜야겠다는 애국심에 박물관을 열었는데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주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라고 말했다. 사립 박물관을 운영하는 데 재정적 어려움은 없는지 묻자 김 관장은 “매년 적자”라고 답했다. “국가는 학예사, 프로그램 교육 인력 정도만 지원해주는 것 외에는 도와주는 것이 없어요. 시내에 있는 것도 아니니 접근성이 떨어지지요. 내 시대에는 적자라도 끝까지 버틸 것이지만, 자손들은 차라리 팔라고 할 수도 있는 거에요. 설립되는 박물관마다 다 그런 어려운 사정을 가지고 있어요” 사립 박물관이 다음 세대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은 사립 박물관 관장들의 공통된 걱정이다.

위치: 대구광역시 동구 파계로 112길 17관람시간: 평일 및 토, 일요일           오전 10시~오후 5시(월요일 휴관) 관람료: 대학생 및 일반성인-3,000       중고등학생-2,500 초등학생-1,500원연락처: 053-743-4300준비 중인 기획전시: ‘세계의 납힐 염색을 찾아서’(6/22~7/29)

▲김 관장은 자연염색으로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을 추출해낸다<자연염색박물관 제공>

▲관광객들에게 박물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 관장

▲자연염색박물관 내부 전경. 자연염색 천과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쪽염 닥종이 오브제(쪽, 닥펄프, 천, 한지. 2004년도작) 일부. 김 관장은 전통과 현대적인 감각을 융합한 작품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다

▲자연염색재료인 홍화로 색을 낸 원단들. 염색 과정을 어떻게 달리 하느냐에 따라 홍색, 황색 등 다양한 색이 나온다

▲전시된 기러기보를 보고 있는 일본 관광객

▲염색과 관련한 것으로 다양한 문양도 전시하고 있다.

글,사진: 김서현 기자/ksh15@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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