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은 기자의 치명적인 죄악이었다.’ 스티븐 J.A. 워드 교수의 저서 ‘언론윤리의 재발견’에서 묘사된 20세기 이후 등장한 기사의 객관성을 중요시하는 이른바 ‘객관성의 지지자’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오직 사실의 진술만이 보도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기자 개인의 의견 개진을 금지했다. 뉴스로서 객관적 자료만을 보도하고, 해당 자료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지난 일요일 취재차 방문한 서울에서 이에 전혀 반하는 주장을 듣게 됐다. 공식 홈페이지 소갯말에 “그 놈의 ‘객관성’을 유지한답시고 묻혀버린 이야기가, 사실이, 사건이 있다면 객관성을 버리겠다”고 당당히 써놓은 20대 대안언론 미스핏츠의 기자들을 인터뷰하던 중이었다. 한 기자가 “뉴스의 기능을 단지 사실 전달로 생각하면 그건 기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고, 다른 기자는 “‘우리는 중립적이고 사실만 전달한다’고 하는 게 오히려 여론호도가 될 수 있고 비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소 강한 표현처럼 들리지만 실로 이제는 단지 ‘객관적’이기만 해서는 미디어 빅뱅 시대에서 영향력을 가진 매체로 자리잡기가 힘들어졌다. 스티븐 교수는 또 앞서 말한 저서에서 ‘전통적 객관성은 저널리즘 안팎의 비판에 의해 약화되어 더 이상 실행 가능한 윤리적 지침이 아니다’고 기술했다. ‘객관적 보도’는 이제 경쟁력도, 타당성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다수 기성언론과 학보사들은 왜 여전히 ‘전통적 객관성’을 띄는 보도를 유지하고 있는가? 미스핏츠의 기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인사를 나눈 후 처음 들은 말이 “학보사 왜 해요?”였다. 나는 멍청하게 더듬거리다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는데, 본지 입사 면접을 준비하며 그럴듯하게 써놓고 달달 외웠던 입사동기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에게 첫 번째 질문, 나는 학보사 기자 활동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상대방은 또 학보사에 투자할 엄청난 노력과 시간으로 학생 기자들이 각자 1인 미디어를 운영한다면 훨씬 파급력이 큰 미디어가 많아지지 않겠냐고 했다. 그 말에 ‘그렇다면 그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학생 기자들이 모인 학보사라는 조직은 왜 파급력을 갖지 못하는 건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 번째 질문, 학보사라는 조직이 가지는 한계는 무엇인가?학보사가 가지는 공적 위치와 체계의 중요성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언론인으로 규정하고 각자가 왜 ‘객관적’ 보도를 표방하며 글을 쓰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뉴미디어 시대에서 전통적 형태의 언론인 경북대신문이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수습기자 시절 달달 외웠던 기자강령들을 다시 읽어보며, 무작정 수용한다기보다는 해당 강령 하나하나의 당위성을 찾아보고 스스로에게 적용시킬 때 재정립이 필요한 강령이 없는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틀을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느껴진다면 이를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김나영사진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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