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부자들’이 11월 18일에 개봉해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 내부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정치, 언론, 경제 유착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면서 그들을 향한 복수로 관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대한민국에서 정치는 이처럼 부정적 이미지로 뿌리 박혀있다.대한민국에서 정치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정치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작동하는 무엇인데 그 사이에 모순성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 미침의 근원적 감정은 불안이다. 한국에서 정치는 불안으로 시작해 불안으로 끝난다. 불안의 형성은 이해[利害]관계를 통해 시작된다. 정치적 불안은 개인으로 시작해 타자의 불안과 합일을 이루며 완성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지칭하는 인간관계는 두 존재로부터 양태를 이루는데 한국 정치 속에는 기형적으로 존재의 수적 증가만 이루어질 뿐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한국 정치에는 인간관계가 없고 이해[利害]관계만 있는 것이다. 이해[利害]관계는 불안의 어머니다. 정치적 이[利]상태를 추구하며 해[害]상태를 피하는 과정은 늘 위태롭다. 이[利]와 해[害]를 구분하는 것은 언제나 주관적으로 이루어진다. 같은 당을 지지하는 존재들도 저마다 이[利]와 해[害]가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이[利]와 해[害]의 모호성은 불안을 가속화한다. 자신의 이[利]가 정치적으로 달성되더라도 불안은 연속적으로 작동한다. 해[害]가 언제 다가올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이[利]상태에 있더라도 해[害]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利]와 해[害]의 반복적 함수는 정치에서 종결되지 않는 연속함수를 이룬다. x축 상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다툼은 y축 상에서 이[利]와 해[害]로 점찍어지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곡선을 만들어 낸다. 정치 불안 곡선 함수에서 x축 상에 놓여진 인간들은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연결된 직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x축 상에 근접하는 순간 그 존재들은 모순적이게도 서로 연결되지 않는 수많은 점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그 점 사이에 존재하는 x는 좌우에 있는 x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위와 아래에 있는 이[利]와 해[害]의 값을 가늠하며 점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고 x가 다른 x를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x는 이[利]와 해[害]의 값을 계산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형성하는 장치로 이용된다. 결국 x는 정치라는 큰 평면 위에 연고되지도 않은 채 허공에 떠 있는 존재로 위치지어진다. 이러한 행태가 집단적으로 이루어져 한국 정치는 완성된다.이러한 정치에서 존재는 고독하다. 그 고독은 허무 속에서 성립되는 고독이다. 허무적 고독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고 신경증적인 미침으로 인도한다. 그들이 추구하고 계산하는 이[利]와 해[害]는 죽어 있는 관념의 언어일 뿐이다. 대한민국 정치는 이렇게 인간을 허무적 고독에 빠지게 만들고 그 속에서 다른 인간을 볼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정치는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정치적 이해[利害]관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좋은 사회와 그 토대를 이루는 인간관계를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대한민국 정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현재 우리가 직면하는 정치는 인간관계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이해[利害]관계를 위한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멀리 있지도 않다. 오늘도 국회와 언론은 시끄럽다. 국민은 지겨울 뿐이다.

공경현(간호대 간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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