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 연구자, 기자. 이것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내 장래희망이었던 것들이다. 주변 친구들 중에선 대통령, 국회의원같이 큰 꿈을 꾸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장래희망은 꼭 직업이어야 할까? 장차 장, 올 래, 바랄 희, 바랄 망. 한자로 장래희망이라는 말은 ‘장차 다가올 미래에 바라는 것’이라는 뜻이다. 장래와 희망을 따로 분석하자면, 용어 사전에서 장래는 앞으로 닥쳐올 날을, 희망은 일을 이루거나 얻고자 바라는 미래를 의미한다. 하지만 왜 이들을 합친 ‘장래희망’이라는 말은 직업을 의미하게 됐을까? 장래희망의 언어적 의미대로라면 그저 자신이 미래에 되고 싶은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래희망으로 그저 미래에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말하면 안 되는가?어쩌면 우리는 ‘재는 삶’에 길들여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왕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어른들에게 ‘창문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어요.’ 라고 말하면 그들은 집에 관해 어떤 단서도 얻지 못한다. 그들에게 ‘십만 프랑 짜리 집을 보았어요.’ 라고 말해야 그들이 대단하게 여긴다.” 같은 대상을 설명하는 말인데도 그에 대한 반응은 천지차이이다. 장래희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면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이런 직업을 갖고 싶다.’라고 말하면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인다. 이처럼 사람들은 세세한 비유들보다는 수치로 계산된 평가 기준이 있어야만 그것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다. 항상 보이지 않는 눈금을 가지고 다니며 그것이 ‘좋다, 안 좋다’라고 재고 다니며, 잴 수 없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눈금으로 잴 수 있는 가치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부끄럽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눈금으로 표시할 수 없는 것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잴 수 없었던 것들’을 집어넣으려 한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좋은지 나쁜지를 확실하게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하지만 그 이후엔 아쉬운 느낌이 분명하게 남을 것이다.그러므로 잴 수 없는 채로 남아있어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꿈 또한 그 안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장래희망이 이대로 희망 직업의 형태로만 남아서는 꿈이라는 것도 ‘잴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의 장래희망은 잴 수 없는 것들을 지키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불분명하지만, 이런 형태의 꿈이 남들에게 인정받을 날이 올 수 있도록, 나부터 실천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주혁(사회대 사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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