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란 쿠르디를 기억하는가?! 지난 9월 초 터키 보드룸 해변에서 등을 구부리고 얼굴을 모래사장 쪽에 묻은 채 잠자는 듯 죽어있던 세 살배기 어린아이 아일란 쿠르디. 아일란의 죽음으로 유럽과 세계는 시리아 내전과 난민사태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과 한국인도 예외는 아니다.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을 온전하게 지켜내지 못한 채 해방공간에서 이산의 아픔을 경험한다. 그리고 저승차사처럼 찾아든 6.25 한국동란으로 이산은 처절을 넘어 극한의 고통을 오늘까지 안겨주고 있다. 남북한에는 1,000만의 이산가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꼬박 40년 동안 생사도 알지 못한 채 한반도 남과 북에 흩어져 살아왔다. 그러다가 1985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3박 4일 동안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동시 교환방문이 실현된다. 평양을 방문한 남한 방문단은 9월 21-22일 이틀에 걸쳐 이루어진 상봉에서 35명이 41명의 가족-친지를 만났고, 서울을 방문한 북한 방문단 30명은 51명의 가족-친지를 만났다고 한다. 분단 70년을 맞은 올해 2015년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너무나 연로한 그분들의 주름진 얼굴과 광채 잃은 눈빛은 지난 세월의 형언할 수 없는 신산함을 웅변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찔끔거리며 남과 북으로 나뉜 이산가족들의 얼룩진 삶에 고통을 안겨주려 하는가?! 열 살, 스무 살에 이산가족이 되었다 해도 이제 그분들은 여든 살과 아흔 살 고령이다. 그럼에도 남북은 정례적인 상봉기획조차 준비하지 못하고 정권의 필요에 따라서 이산가족 상봉을 제비 눈물만큼만 허용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민족이나 국가 혹은 형제애나 인류애라는 대의보다 정파나 집안의 이해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분단 동서 도이칠란트는 1970년 이후 빌리 브란트 서도이칠란트 총리의 위대한 ‘동방정책’ 이후 화해와 상생의 길을 달려간다. 비록 ‘베를린 장벽’으로 상징되는 냉전체제를 유지해왔지만, 그들은 “어떤 이데올로기도 민족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명제를 굳건하게 실천했다. 오죽하면 바이에른 주지사를 역임한 강경보수의 대명사 프란츠 슈트라우스마저 동도이칠란트에게 수억 달러를 공짜로 퍼주었겠는가?! 슈트라우스 주지사의 논리는 단순했다. “만일 우리가 서로 반목하고 손가락질 하며 싸운다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이데올로기 때문에 갈라져 살지만 우리는 사이좋게 잘 살아야 한다!” 분단 서도이칠란트 최강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던 바이에른의 우파정객은 그런 생각으로 에리히 호네커 동도이칠란트 서기장에게 마구 퍼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남한의 우파정권이나 정치인들과 확연하게 차이나는 대목이다. 그들에게는 민족도 국가도 역사도 미래도 없다. 그저 정권유지나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일신의 출세나 가족단위의 영광과 쾌락만 좇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시대착오적인 ‘종북몰이’에 분주하고 허황한 ‘통일대박’을 꿈꾼다.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는 통일한국의 장밋빛 전망을 말한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는 남북 이산가족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산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남북한 화해와 상생에서 출발한다. 신뢰구축과 상호이해와 상호방문을 이어가면서 미래기획을 해나가야 한다. 한국동란 당시 우리 한국인도 아일란 쿠르디처럼 난민이었다. 시리아 내전이 조속히 종식되고, 남북한 이산가족의 고통이 하루빨리 막을 내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이야말로 질기고 질긴 이산의 고통을 마침내 끝장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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