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전국교수대회에 이어서 지난 10월 2일에는 전국국공립대학공동행동이 주최한 학생대회가 개최되었다. 교수와 학생들이 행동에 나서는 매우 드문 일이 벌어진 것은 교육부의 대학에 대한 전횡이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육부의 일방적인 압력이 자칫 민주화 이전의 교육 체제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 독재 체제는 바로 행정이 민간에 우위를 점하는 체제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그 독재 체제는 학생이 중심이 되는 대학으로부터의 저항에 의해서 무너졌다. 물론 오늘의 대학을 민주화 이전의 대학과 비교할 수는 없다. 대학도 사회도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도 전체 사회와 마찬가지로 변화가 필요하다. 흔히 교육을 백년대계라고 하여 그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대학의 개혁이 졸속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학도 변화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변화는 대학 구성원들에 의해서 추진되어야 마땅하다. 대학 자신이 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대학의 진리 추구 기능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만약 대학이 진리를 추구하는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하면 더 이상 대학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곧 대학의 죽음을 말한다. 오늘 대학은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고 고현철 교수의 죽음은 대학의 죽음을 알리는 경종이었다. 오늘날 대학이 이 지경에 이른 데에는 대학의 중요한 구성원인 교수들의 책임이 크다. 교육부의 전횡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했고, 기업의 일방적인 인사 관행에 제동을 걸지도 못했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인재가 어떠한 인재가 되어야 하며, 지식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생산되고 공유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정부나 기업, 시민 사회를 납득시키지 못하였다. 대학은 정부, 기업, 나아가 시민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다양한 지식을 생산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외부와의 상호적인 투입과 산출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대학은 이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위한 상호 투입과 산출 과정에서 주도적인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전체 사회에서 대학의 위상이 저하되었고, 대학이 배출한 청년들은 취업난을 겪고 있다. 대학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 대학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투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리를 산출할 수 없고, 또한 대학의 지식이 투입되지 않으면 사회도 자신의 기능을 산출할 수 없다. 대학이 진리를 산출하는 방식은 연구와 교육과 사회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대학의 개혁은 연구와 교육과 사회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 대학이 대학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한다. 대학은 다른 사회와는 달라서 이익사회에 속하면서도 공동사회의 특질을 가지는 협동사회라고 한다. 협동사회는 무엇보다도 대학의 구성원의 협동을 말하며, 나아가 전체 사회의 협동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과 관련되어 참 좋은 말이 있다. ‘교학상장’, 곧 ‘가르치고 배우고 서로 자란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가르치고 배우는 삶을 사는 것이 대학이다. 이 점에서 대학과 대학이, 교수와 교수가, 교수와 학생이, 교수와 시민이, 학생과 시민이, 또 교직원이, 그리고 경비아저씨와 청소부아주머니들이 자주 만나고,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나누고 서로 성장하는 대학이 되어야겠다. 대학이 사회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대학 구성원들이서로 고립되지 않아야 한다. 고 고현철 교수를 추모하면서 다시한번 교육과 연구와 사회 참여가 서로 자라는, 교수와 학생이, 대학과 사회가 함께 자라는 대학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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