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연휴에 생각하는‘인성교육진흥법’

며칠 있으면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이다. 올해 들어 가장 큰 보름달이 뜰 것이라는 올 한가위 연휴를 어떻게 보낼까?  지난 7월 이른바 ‘인성교육진흥법’이 본격 시행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 교육계는 1월 국회에서 제정된 ‘인성교육진흥법’에 의거 7월 21일부터 범국가적으로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인성 피폐 현상이 너무도 심각하여 그 어느 때보다 인성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피폐된 인성이 교육부 당국자의 말대로 ‘세계 최초로’ 법(매뉴얼)을 만들어 훈련시킨다고 갑자기 복원될지 의문이지만, 한 국가의 격이 경제적 지표로만 측정되는 것이 아님을 이 나라 위정자들이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찾을 수는 있겠다. 늘 그렇듯이 문제는 인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인간의 인격적 품성, 곧 ‘인성’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의 공동체정신에 기초한 역동적인 상상력과 창의력이라고 거칠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가 전통적인 공동체적 덕목이라면, 후자는 미래지향적인 개인적 가치이다. 이 두 가지 가치와 덕목이 개인과 사회와 국가, 나아가 세계의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보자면 인성이란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식물이 생장하듯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옛 시절 우리 각자의 인간됨은 가족공동체 내 어른들의 솔선수범과 대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성되었다. 이제 본받을 만한 어른들의 솔선수범도, 순리대로 흘러야 할 자연공동체도 사라져버린 ‘궁핍한 시대’에 제대로 된 인성은 어떻게 함양될 것인가? 헝가리 문학사가 루카치의 『소설 이론』첫 구절은 관념적이기는 하지만 언제 읽어도 장대하고 통쾌하다. 별이 빛나는 천공을 보고 가야 할 먼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그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 시대에는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친숙하였고, 모험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결국 자기 것이 되었다. 아무리 광대한 세계일지라도 자기 집처럼 아늑했고, 자아와 세계, 타오르는 내면의 불꽃과 천공의 별빛이 서로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도의 도시화가 진척된 현시점에서 이러한 루카치적 의미 그대로의 자아와 세계의 친숙함 혹은 조화를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예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것과 가능을 꿈꾸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다르다. 이번 한가위 연휴에는 모처럼 해후한 친지들과 도란도란 모여앉아 잃어버린 공동체정신의 회복을 꿈꾸어보자. 그런가 하면, 200여 년 전 독일문학의 황금기를 이끈 쉴러의 ‘미적 인간 교육론’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계몽은 개개인의 성격에 달려 있다. 머리에 이르는 길은 심장을 통해 열리기 때문이다.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이야말로 시대의 절실한 요구이므로, 모든 정치적 영역의 개선은 인간의 성격을 고귀하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개개인의 성격을 고귀하게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도구는 무엇인가. 핵심적인 이 물음에 쉴러는 ‘아름다운 예술을 통한 미적 교육’을 답으로 제시한다. “어떠한 정치적 타락에도 깨끗하고 순수하게 남아있을 샘물은 불멸의 아름다운 예술의 모범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술을 통한 미적 교육? 이보다 더 나은 인성교육 방법이 어디 있는가. 훌륭한 인성이란 더 이상 예나 효 같은 전래의 보수적 가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상상력과 창의력이어야 한다면, 이번 한가위 연휴에는 최소한 한 편의 예술작품, 한 권의 문학작품을 읽자.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 속에 상상력과 창의력의 샘물이 철철 흐르는데 어찌 그 샘물을 안 마신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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