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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따라 길 따라

부산의 오늘과 어제가 마주보는 곳, 중앙동40계단

 

 

남해 출신 소설가 정영선의 <실로 만든 달>에는 동래읍성, 40계단, 광안대교 등 부산 곳곳이 깊게 숨 쉬고 있다. 그 중 부산의 근대를 만날 수 있는 40계단으로 가는 여장을 꾸렸다.
중구는 개인적으로 아끼는 동네다. 용두산공원이 있는 광복동, 비프광장과 자갈치시장이 있는 남포동, 그리고 옛 중심지 중앙동까지. 원도심(原都心)이란 말에 걸맞게, 옛 풍금처럼 손때 묻었으나 여전히 그 생동감이 넘실거린다.
지하철 안은 남포동이나 자갈치시장에서 내리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그 앞선 역인 중앙동에 내렸다. 다닥다닥 붙은 키 작은 건물들과 오래된 간판, 40계단으로 향하는 조용하고 정돈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거리의 끝에는 빛바랜 잿빛 계단이 정면을 마주보고 있었다.
“가파른 40계단의 스텐 난간이 막다른 골목 끝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6·25전쟁과 피란민들의 가난과 고통을 상징하는 계단이었다.”
높지 않은 계단이다. ‘덕재 씨’는 어린 시절 성폭행했던 여동생 ‘정원’을 27년 만에 만나서 건넬 말을 고심하며 이 계단을 본다.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가 된 부산에 온 실향민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가까운 부두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내다 팔다 보니 자연히 사람들이 모였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은 서로 “40계단에서 모이자”고 약속했다. 계단 중간에 다다르면, 아코디언을 든 동상에서 옛 노래가 흘러나온다. 전쟁 중의 서러움과 반가움이 교차했을 공간이었고, ‘덕재 씨’에게는 오래된 죄악감과 초조함이 겹쳐드는 공간이다.
“자동차 두 대가 겨우 교행할 만한 좁은 도로가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난 동광동 인쇄골목으로 향했다. 모두 몇 십 년 전에 시계가 고장 난 듯 아날로그적인 인쇄소들뿐이었다. 제대로 영업하는지도 모를 이 건물들은, 틈도 없이 붙어 세월을 견뎌오고 있었다. 그러나 책 속의 쇠락한 분위기가 그리 만연하지는 않았다. 산뜻한 색채로 골목 곳곳을 메우는 벽화들이 눈을 즐겁게 하는 까닭이었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제2회 거리갤러리 미술제’라는 안내지도가 벽에 붙어있었다. 각각 천(天), 지(紙), 인(人)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들은, 예술가의 손길이 닿아 파스텔 색과 원색으로 소박한 치장을 한 것이다.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더운 줄도 모르고 인쇄소 셔터에 그려진 푸른 나무와 재잘거리는 새,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가열 찬 그라피티까지 쫓아다녔다.
“사무실 아래로 난 40계단의 입구에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맞은편 가로등 불빛에 스테인리스 난간이 번쩍거렸다.”
계단으로 다시 돌아오니 차츰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밤바람에 바다비린내가 실려 왔다. 저 멀리 부둣가에서 배가 반짝 빛났고, 차들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날이 저무는 가운데 40계단만 홀로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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