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專業)’의 창조성 이제는 대중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조선시대의 유물 가운데 하나가 의궤(儀軌)이다. 불과 20여 년 전에만 하여도 의궤는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낯선 존재였다. 의식(儀式)의 궤범(軌範), 곧 행사나 의례를 치를 때 이를 따라만 하면 그대로 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의궤는 지금으로서는 매뉴얼과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의궤는 단지 행사를 치르기 위한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의식이나 행사에 대한 종합적인 모든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준비과정이나 실행과정, 심지어 준비한 사람들의 명단이나 물품 등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행사의 경우 이를 묘사하는 그림도 당연하게 포함이 되었다.필자는 우연하게 의궤에 포함된 그림을 조사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외규장각(강화도 소재)의 의궤를 조사하면서 조선시대 의궤 전체를 대상으로 그 간의 연구동향을 정리하는 일 때문이었다. 이 조사를 하면서 필자는 현존하는 의궤가 대체로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것이 주로 남아 있는데, 이들 의궤는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사적 기념비에 해당하는 책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의궤에 담긴 내용은 각 시대의 대표적인 의식이나 사건을 설명하고 있기에 이를 통해서는 다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는, 또는 확인이 된다면 당시인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정리된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의궤의 내용은 내용대로 당시 의식이나 사건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또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자료가 된다.하지만 그러한 내용과 관련된 자료는 비단 의궤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의궤와 비슷한 각종 등록(謄錄) 또는 실록이나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과 같은 연대기 사료에도 비슷한 내용의 자료가 있기 때문에 의궤 고유의 것이라고만 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의궤의 분석은 이들 연대기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서 더욱 명료해질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의궤의 종합적 분석을 통한 역사성은 어디에서 찾아야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궤에 사용된 종이, 의궤에 쓰인 글씨체, 의궤에 그려진 그림 등은 모두 당대 문화의 산물인 동시에 의궤가 생산되었던 당대의 역사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 될 수 있다. 의궤에는 여기에 쓰인 물품 목록이나 서사관(書寫官), 화원(畵員)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의궤를 살펴보면 비교적 남아있는 의궤 가운데 초기에 해당하는 17세기의 의궤는 종이의 지질이나 그림의 수준이 떨어지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즉 18세기의 의궤는 그에 비해 의궤를 만드는 수준이 정교해지거나 그림의 구성이 복잡해지고 묘사가 치밀해지며, 종이의 지질이 뛰어나며 글씨 또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의궤에 보이는 이러한 특징은 단지 시기에 따른 변화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와 같이 설명한다면 19세기에 편찬된 의궤가 여러 방면에서 18세기의 의궤보다 질이 떨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의궤의 담긴 내용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의궤에 표현된 그림이나 글씨, 혹은 지질까지 총체적으로 분석되어 당대 의궤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역사성이 규명될 때에 비로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그림이나 글씨, 혹은 지질의 수준이 높거나 낮다라는 수준에서 분석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차도에 표현된 정교한 묘사나 그림의 구성은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화원을 양성하고, 운영할 수 있었던 능력에 대해 제대로 설명될 때만이 의미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조선에서 의궤를 만들 수 있었던 능력 가운데 제도적으로 중요한 뒷받침을 하였던 것이 바로 화원(畵院)제도였다고 생각한다. 국가에서 전업으로 오직 그림그리는 일만을 할 수 있도록 전문가를 양성하고 대우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화원은 한가하게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감상화(鑑賞畵)를 그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화원의 일은 행사를 기록한 의궤의 행사도나, 왕실의 수요에 응하는 등, 지금으로라면 사진기사나 비디오촬영기사와 같은 공적 역할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고, 제도적으로 일정한 급여를 주었기에 이들의 기술이나 감각은 시간이 갈수록 발전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하여 외규장각에서 눈이 휘둥그레져 놀라면서 보았던 그림은 바로 이들 화원의 존재와 그를 가능하게 하였던 조선 정부의 시스템, 특히 전업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안정적인 바탕을 마련한 데서 유래하였던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높은 것이 지금도 통용되는 현실이다. 조선시대에 비록 신분적으로는 중인으로 묶여 있었지만 제도적 보장을 안정적으로 받았던 화원들이 만든 의궤의 그림은, 그림이 단지 손재주의 산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문화, 나아가 그러한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문화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대답은 자명하다.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것, 그 이상의 정답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공부가 직업인 대학원생들에게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전업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하는 BK21플러스 사업은 새로운 한국의 미래를 만드는 원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과 세계를 아우르며, 과거에서 미래로

 경북대학교 사학과의 ‘글로컬역사문화전문인력양성사업단’은 교육부의 지원 아래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역사분야의 대형사업단으로 2년 전에 선정되었다. 글로컬이란 로컬(영남학/한국학)과글로벌(동아시아학/서양학)을아우르는 의미에서 조합한 말이다. 사실 로컬과 글로벌이란 지역이나 학문으로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로컬에 해당하는 영남학이나 한국학에 이미 글로벌 영역의 생각이나 현실적 힘이 작동하는 것은 물론이고, 글로벌이란 영역도 구체적인 지역에 대한 정체성이나 연구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눈동자나 발바닥의 신체 어느 한 곳을 보면 그 가운데 사람의 신체 전 영역의 건강상태가 드러나 살필 수 있듯이, 지역에 대한 구체적 문제 속에 담겨진 세계의 문제 역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동서양사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2년간 대학원생들은 안정적인 연구환경 속에서 각종 지적 자극을 받는 데에 모자람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학과에서는 기존의 한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전공구분을 넘어서서 글로컬히스토리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대학원의 정규수강과목으로 글로컬히스토리연습이라는 과목을 개설하였다. 이 강의는 사학 내의 각 전공을 횡단하여 통용될 수 있는 역사이론을 검토하고, 실제로 적용할 수 여부를 검토하는 새로운 형식의 강의였다. 종래 대학원 강의에서 함께하지 않았던 각 전공영역의 학생들이 모두 참여함으로써 상호 이해를 높이고, 역사를 전체적으로 고민하는 안목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매달, 학과에서 채울 수 없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국내외에서 초빙하여 이른바 ‘글로컬히스토리세미나’의 이름으로 세미나를 진행하였다. 종래 학술강연이 강연자 일방의 주장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형식에서 벗어나 전공대학원생에게 한정하여 행하는 강연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살렸다. 그래서 강연자에게는 1시간 내외의 최소한의 발제를 하게 한 뒤에 거의 2시간에 걸쳐서 다양한 각도에서 질의 응답과 토론을 하게 함으로써 학술강연과 세미나가 복합된 새로운 형태의 세미나를 진행하였다. 대학원생들은 회가 거듭할수록 질문이 날카롭게 벼려졌고, 강연자 역시 단순한 지식의 전달에서 넘어서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새롭게 가다듬는 상호작용이 넘치는 세미나를 만들 수 있었다.  또 매년 1회씩 2회에 걸쳐 시행한 국제학술회의는 대학원 강의와 연계하여 주제를 선정하여 대학원생들의 참여욕구를 높였으며, 국제적인 시야에서 논의해야 하는 주제에 대한 시야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대학원생들이 주체가 되어 방학을 이용하여 매번 단기연수의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국내의 틀에서 벗어나 비교사의 안목을 기르고, 새로운 사료를 확보하는 계기로 삼기도 하였다. 미국, 일본, 영국, 중국, 베트남까지 글로컬역사를 탐구하는 사학과 대학원생들의 눈은 확대되고 넓어지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다양한 활동으로 인해 무엇보다도 대학원생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중요한 동기가 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궁극적으로 개인이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문학, 특히 역사학의 경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이를 일반화하고 대중화하는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학문적 작업은 결과의 생산과정에서 동료들과의 토론, 이를 통한 피드백 등의 작업이 학문공동체를 만들고, 이것이 결국 자연스레 밖으로 드러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모든 활동은 생각해보면 BK21플러스 사업이라는 교육부의 지원 사업에서 유래하였다는 점이다. 옛말에 항산(恒産)에서 항심(恒心)이 난다고 하였듯이 전업으로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함으로써 새로운 학문으로서 글로컬역사학의 탐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7년의 지원을 약속하고서도 불과 2년 만에 전면적인 재평가를 하겠다고 하는 교육부의 방침은 이러한 장기적 지원이 갖는 많은 장점을 무색하게 하는 근시안적 조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라고 하는데, 제발 약속한 7년이라도 제대로 지원하는 전통을 만드는 것이 우리시대에 그리 어려운 일인지 되묻고 싶다.

정재훈교수(인문대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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