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세금을 받으며 공익을 위해 일해야 할 공무원이 비리를 저지르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이에 정부는 부정부패의 척결을 위하여 선진 각국으로부터 정교한 부정부패 방지제도를 도입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각종 법령도 정비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부정부패의 척결을 위한 우리 고유의 제도가 존재했었다. 암행어사제도가 바로 그 예다. 오랜 기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온 암행어사제도가 현대 사회에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자●

백성들의 믿음으로 만들어진 어사 박문수
탐관오리가 판을 치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세상에 홀연히 나타난 어사 박문수, 그는 사회의 부패를 척결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이상적인 위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문수는 비밀리에 파견되어 민정을 시찰하고 관리의 비리를 캐내는 암행어사로 활약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는 왜 박문수를 암행어사로 생각하고 있을까? 또 박문수란 인물은 실제로 어떤 인물일까?
1728년 이인좌의 무리는 영조와 노론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이를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는데, 박문수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영조의 깊은 신뢰를 얻게 된다. 이후 박문수는 요직에 두루 등용된다. 박문수는 일 년간 네 차례 어사 직위를 역임하게 되는데, 이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세금 관련 법을 제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비밀리에 지방에 잠입하여 관리의 부패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암행어사의 역할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럼 도대체 어떤 점이 박문수를 민중들에게 영웅으로 비치게 만들었을까?
1729년(영조 5년) 이해 여름 박문수는 함경도 지역에 집, 가구, 그릇들이 떠내려 온다는 보고를 받았다. 홍수가 났던 것이다. 그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구제가 급하다고 보고 도내 기관에서 곡식을 함경도로 보냈다. 그에게는 조정으로부터의 문책보다 백성들의 고통이 우선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박문수가 누구보다도 가난한 백성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문수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조선의 문학 속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야담집에 실린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뜻밖에도 민중들은 박문수를 시대의 영웅·정의의 사도로 보고 있지 않다. 야담집 속에는 박문수 형제가 부정한 방법으로 과거에 합격한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못생긴 계집종과 동침한 이야기, 친척의 부탁을 받고 꾀를 내어 취직시켜준 이야기 등 이상적인 어사로서의 면모를 찾기 어려운 사례들이 등장한다. 일부 해결사로서 활약하여 어사다운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박문수는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남긴 어사 중 한 명이었고 친숙한 얼굴을 한 이야기 속 주인공일 뿐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현대 위인전에서 다루고 있는 부패를 척결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모습들이 후대에 많이 과장되거나 미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 도대체 박문수는 어떻게 정의의 사도·암행어사의 대명사로 굳혀지게 된 것일까?
소설 ‘박문수전’에 등장하는 박문수 일화는 이전의 야담집에 수록된 박문수의 부정적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백성들의 고충을 지혜롭게 해결해주는 어사로 박문수를 그리고 있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시대적 분위기와 연관돼 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의 근현대에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가 닥쳐왔다. 국가적 격동과 고난의 연속에서 대중은 어지러운 나라를 구원할 영웅, 위인이 나타나길 바란다. 이 같은 민중의 열망이 문학적으로 ‘박문수전’과 같은 소설을 만들게 된다. 문학작품을 통해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후 1930년에 박문수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되는 등 박문수의 이미지가 소설, 영화 등을 바탕으로 폭넓게 형성되어 갔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1970·80년대에 아동용 전집과 위인전 등 다양한 출판물이 쏟아졌는데, 이들 출판물의 주인공의 하나로 박문수가 다루어지면서 위인전 주인공으로서의 박문수 이야기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암행어사제도의 도입
암행어사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제도로서, 근 4백년 동안 운용, 발전됐던 제도이다. 그 결과 암행어사는 방방곡곡의 백성들에게 왕의 뜻을 알리고, 부패한 관리에게는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존재가 되어 법을 수호하는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암행어사는 어떻게 도입되게 되었을까.
조선시대는 왕이 통치하는 중앙집권사회였다. 지방은 전국을 약 340개 부,목,군,현으로 나누고 지방마다 관리를 임명하여 행정 및 사법권을 주어 통치하게 했다. 그 당시 지리상의 문제로 왕은 수도권을 비롯한 일부지역만 직접 감독하고 그 밖의 지방은 도별로 임명한 감사(감찰사)로 하여금 왕을 대신하여 수령 등을 감시·감독케 했다. 수령들에 대한 감사의 감시감독에는 한계가 있었고 감독이 철저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세조 때에 각 지방에 사헌부 분대를 설치하여 어사를 파견하였다. 이후 어사 파견에 관하여 오랫동안 논의해 중종이 암행어사를 처음 파견하였고, 명종은 어사가 역마를 이용, 암행하도록 하여 암행어사를 제도로 정착시켰다. 암행어사의 파견 여부는 전적으로 왕이 결정하였다. 왕이 파견이 필요한 지역이라고 판단되면 어사를 임명하여 지정된 지역을 염찰하도록 하였다. 초기에는 특정 지역에 흉년이나 홍수 등으로 피해가 큰 경우, 관리가 부패한 경우, 또는 민심이 불안할 때에 비정기적으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였다. 점차 암행어사의 파견이 정례화 되었고, 숙종 때부터 파견 지역을 왕의 추첨으로 결정하였다. 암행어사는 왕이 직접 뽑아서 파견하는 비밀사신이고 상설제도가 아니기에 법전에 그 자격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문헌에 의하면 당하 시종관이 원칙이며 특히 삼사 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당하관이 주로 유자격자로 인정되었다. 암행어사하면 마패를 빼놓을 수 없는데, 당시에는 교통기관으로 국내 각지에 역이라 칭하는 관청을 두었고, 이곳에서 역마를 교통에 이용하였다. 어사는 소지한 마패에 조각된 수량만큼 이들 역마를 징발할 수 있었다. 다만 역마를 타는 사람이 흔하지 않던 시기였으므로 임무수행 이전에 신분이 노출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했다.

암행어사의 임무
“금동이에 향기로운 술은 천사람의 피요. 옥 소반에 기름진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초 눈물 떨어질제 백성의 눈물은 떨어지고 노랫소리가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가 높더라! 옳지! 이놈이 정녕 요즈음 민심을 소요시키고 돌아다니는 그 불량지도인가 보다.” 춘향전에서 몽룡이 사또를 벌하기 전에 읊는 대사다. 암행어사는 주로 지방 수령들이 행한 각종 업무처리에 불법이나 비리가 있는지를 조사하였다. 잘못이 있는 관리들은 처벌하였고 선정을 베푼 모범적인 관리들은 찾아내 포상을 건의하였다. 암행어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궁한 선비 모습으로 변장하여 생읍(?邑 : 추생군현의 고을)으로 가서 암행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방문하는 지역의 숙식지(주막, 민가 등)에서 직접 경험하거나 풍문에 의하여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수령을 직접 만나서 정보를 확인하거나 수행원을 각지에 분산시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염찰활동 결과 만일 수령 등의 불법·비리 사실이 탐지되면 출도를 한다. 출도란 암행어사가 신분을 밝히고 직무를 개시하는 것으로 임무수행의 필수이며, 대부분의 경우 생읍에서만 실시할 수 있었다. 출도 후 암행어사는 문부를 열람하고 창고 내외를 점검하며 옥외죄수를 살피는 등 그 지방 수령이나 이속의 업무상 잘잘못을 따지고 잘못이 있으면 증거를 채집한다. 효행이 뛰어난 사람이나 열녀를 찾아내 표창하거나 기리고 산야에 묻힌 선비를 찾아내 벼슬길을 열어주는 등 건전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유지하도록 지원하였다.
암행어사의 임명 및 파견여부는 왕이 스스로 결정하였으므로 왕의 자질과 정세파악의 정도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되었다. 왕이 어사파견의 적기를 알아낼 방법이나 시스템이 없었고 스스로 판단하는 데도 한계가 있으므로 부적합과 비능률이 발생했다. 암행어사 파견 건의 시에 왕이 이를 묵살하는 사례가 많았고 심지어는 건의한 사람을 처벌한 사례도 있었다. 실제 영조 41년에 정언 박필순이 암행어사의 파견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자, 이는 간관으로서 청할 일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왕이 그를 파직했다. 암행어사의 임명 및 활동이 모두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구도 없었으므로 임명 받은 개인별 능력에 따라 활동 성과가 결정됐다. 즉, 암행어사의 활동에 많은 어려움과 제약이 따랐으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암행어사는 최초 임명된 자들이고 암행어사로 다시 임명되는 사례도 매우 드물었으므로 암행염찰기법 등을 발전시킬 수 없었고 다른 어사의 경험과 기법을 배우거나 연구할 기회도 없었다. 또한, 극비리에 활동하게 되는 허점을 이용하여 암행어사를 사칭하는 사람이 늘었고, 또 관리들 가운데 그들에게 속아 여러 가지 편의를 보아주기도 하는 등의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대의 우리나라는 주민의 직접선거로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를 구성한다. 그러나 각종 언론에서 지방정부와 관리들의 불법행위와 비리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정부는 우리 고유의 제도인 암행어사제도를 포함한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암행어사제도의 운영성과와 한계」
(임병준)
「문화 : 암행어사 이야기의 현재적
적용과 스토리텔링 방식에 대하여
-<신 암행어사>를 대상으로」(유광수)
「역사 속의 박문수와 암행어사로의
형상화」(심재우)
「조선조 지방행정통제와 암행어사제의
역할 및 한계」(김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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