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모 일간지의 보도에서 나온 ‘달관세대’에 대한 기사는 많은 이들에게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 기사에서는 달관세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양극화, 취업 전쟁, 주택난 등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절망적 미래에 대한 헛된 욕망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사는 게 낫다.”라고.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서 나아가 이제는 인간관계,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오포세대가 등장한 마당에,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투로 ‘자극도 계속되니 즐기고 있더라’라는 식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단순히 분노 또는 긍정하기 앞서서 ‘달관세대’라는 말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사에서는 먼저 일본의 ‘사토리(悟り, 깨달음) 세대’라는 단어를 먼저 꺼내고 있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현실의 명리에 관심을 끊고 득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세대’는 자동차, 연애, 해외여행 등에 관심이 없고 돈과 출세에도 관심이 없는 득도한 것처럼 욕망을 억제하며 살아가는 세대이다.

그래서 사토리 세대라는 언어를 타 언론에서는 ‘득도’세대 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기사에서는 사토리 세대를 ‘득도’가 아닌 ‘달관’으로 절묘하게 바꿔서 부르고 있다. 득도란 ‘오묘한 이치나 도를 깨달음’이라는 뜻이고, 달관은 ‘사소한 사물이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을 벗어난 활달한 식견이나 인생관’을 뜻한다. 득도와 달관. 얼핏 보면 비슷한 언어이지만, 그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행위 주체의 ‘선택이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즉, 득도는 현상을 아는 것이고, 달관은 현상을 모르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본 차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렇다면 그 기사에서는 왜 득도가 아닌 달관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였을까? 기사의 소제목에서는 다음과 같다. ‘불확실한 미래보다는…삶 희생해 얻는 건 스트레스,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게 최고’, ‘현실 안주 젊은이 많아지면 경제성장에 부담될 수도’ 역으로 생각하면 ‘확실한 미래를 위해 삶을 희생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젊은이는 곧 달관세대이며, 달관세대는 곧 경제성장의 부담이므로, 젊은이들은 경제성장의 부담되는 존재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기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20대는 자기희생 없이 철없이 현실에 만족하는 게으른 족속들’이다. 과연 우리는 게으른가? 스펙과 학점에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고 더 좋은 직장, 더 나은 생활을 위하여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희생이 없으며, 현실에 만족하는 집단들인가? 언론에서 바라보는 20대가 이러한 모습이라니 정말 유감을 금할 길이 없다, 달관세대를 이야기 하신 기자님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 버벌진트가 부릅니다 ‘기름 같은걸 끼얹나?’

허필윤(사회대 정치외교 08)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