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중심에는 동성로(東城路)라는 거리가 있다. 동성로라는 이름을 다시 보면 ‘성의 e동쪽에 있는 길’이라는 뜻이다. 성도 없는데 왜 성의 동쪽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과거 그곳에 읍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읍성은 언제 어떻게 사라지게 된 것일까●

대구에도 읍성이 있었다?

현재의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가 옛 읍성이 있었던 장소이다. 지금은 이 장소들을 찾아가도 읍성을 볼 수 없는데 1906년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됐기 때문이다. 읍성은 산성과 달리 주로 평지와 산기슭에 지어져 성 행정기관과 촌락들을 보호했다. 읍성은 행정과 군사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했던 것이다.

최초의 대구 읍성은 선조 23년(서기 1590년)에 부사 윤방에 의해 흙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1년 만에 파괴됐다. 사실 대구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조선에서 크게 주목 받는 도시가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의 지리적 중요성이 인정받게 되면서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 오게 됐다. 경상감영은 조선의 지방 행정 구역인 8도 중에서 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청이다. 하지만 경상감영이 대구로 온 이후에도 130년 동안 읍성이 없었다. 이후 1736년에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가 다시 읍성을 만들었다.

대구 읍성은 1736년 1월 8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6월 6일에 공사를 완료했다. 78,548명이 동원된 대공사였다고 한다. 성곽의 전체적인 모양은 네모나지만 남쪽이 약간 돌출된 세모꼴이었다. 성곽 외벽의 둘레는 2700미터 정도였고, 높이가 약 5미터 정도였다. 성곽의 외벽에는 4개의 문과 2개의 작은 문이 있었다. 4개의 문 중 남문이 정문이었다. 그 이름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였다. 영남제일관은 경상감영과 마주보는 위치로 남향을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이 반영돼 지어졌다. 영남제일관은 현재의 약전 골목 쪽에 위치했었다. 서문은 달서문이라고 하여 구 조흥은행 서성로점 위치에 있었다. 북문은 공북문이라 불렸으며 북성로 경북소방설비 네거리에 있었고, 동문은 진동문이라 불리며 동성로 제일은행 대구지점 네거리에 위치했다. 

이제 읍성의 내부를 알아보자. 읍성 안에는 감영, 부아, 진영이 있었다. 이들 각각은 도호부 자체를 관할하기 위한 행정조직과 대구의 군사와 행정 업무를 맡았던 조직이라 할 수 있다. 남북은 주로 행정을 담당했고  동서로는 생활 중심권이 형성됐다.

왜군을 막기 위해 지어졌던 대구 읍성은 친일파에 의해 다시 한 번 파괴됐다. 1894년으로 거슬러 올라 가 보자.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병참부대가 달성공원에 잠시 주둔했던 것을 시작으로 일본이 대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후 1910년경에는 7,392명의 일본인이 대구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1904년에는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고 대구 읍성의 북쪽에 대구역이 만들어졌다. 1907년 당시 대구군수 겸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이 읍성의 철거를 건의했고 중앙정부에서는 철거를 거부했지만 친일파였던 박중양이 임의로 공사를 진행했다. 당시 읍성 주위의 땅을 일본인이 대부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읍성을 허문 것이 땅값 상승을 위한 것이 아니였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읍성이 없어진 후 읍성이 있었던 자리 주위로 도시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읍성에 사용됐던 돌들은 계산성당, 제일교회, 동사의료원 등의 건축에 사용됐다. 당시 박중양은 돌 1개당 1냥에 일본인들에게 팔았다고 한다. 

‘팔공산 높이 솟고 낙동강 물은 맑다’ 본교 교가 1절의 첫 소절이다. 교가에서 볼 수 있듯이 대구는 산과 강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 주변의 산과 강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 지 알아보자 

우리에게 친숙한 대구의 산

대구를 대표하는 산이라 하면 비슬산과 팔공산이 꼽힌다. 비슬산은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산이다. 흔히 말하는 앞산 역시 비슬산의 끝부분에 해당된다. 이들이 만들어진 때는 중생대 백악기 말(약 1억만 년전~6천 5백만 년 전)이다.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산답게 앞산에는 화산 지형의 특징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화산폭발에서 볼 수 있는 암석인 안삼암과 앞산 능선의 주상절리가 그것이다. 주상절리란 기둥 형상의 바위들이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주상절리는 마그마가 급격히 식어 틈이 만들어지고 그 틈이 풍화되면서 만들어진다. 비슬산의 다른 지형적 특징으로는 돌강이 있다. 돌강은 돌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모습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비슬산의 돌강은 빙하기(약 8만년 전부터 1만년 전 사이)의 기간 후 기온이 영하에서 영상으로 올라가면서 얼어있던 지층이 녹으면서 만들어졌다. 

팔공산은 태백산맥으로부터 시작한다. 팔공산은 해발 1,193미터의 중심부를 두고 양쪽에 동봉과 서봉을 가지고 있다. 팔공산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돼 있는데 화강암은 심성암으로 마그마가 땅 속에서 굳어 만들어진 암석이다. 따라서 팔공산을 이루는 화강암은 6,000만년 전에 대구 지역의 퇴적암들 사이로 관입한 마그마가 굳어진 것이다. 이후 침식이 일어나면서 화강암을 덮고 있던 퇴적암은 사라지고 화강암만 남게 되었고 지금과 같은 모양을 하게 됐다. 또한 단단한 변성암과 화강암 사이의 차별 침식이 일어나 화강암이 탑처럼 쌓여 있는 탑바위를 볼 수 있다. 팔공산에서 가장 유명한 갓바위 역시 이러한 탑바위를 조각하여 만든 것이다. 

아름다운 대구의 강

금호강과 신천은 대구의 생태관광자원과 용수공급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천형성은 강바닥 암석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금호강은 낙동강의 지류 중 하나로 대구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금호강은 영천과 경산 지역을 거쳐 화원유원지 부근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조선시대부터 금호강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고 현재도 약 300여 만 명이 살고 있다. 

금호강의 금호는 비파 같이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하는 뜻으로 이름대로 금호강 주변의 경치는 아름답다. 특히 금호강의 중류인 금호는 낮고 평평해 호수처럼 잔잔하게 보인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금호강에는 하식애(河蝕崖)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데 하식애는 하천의 침식에 의해 깎여 형성된 절벽이다. 하식애가 나타나는 강은 침식이 많이 일어나서 수심이 깊다. 또한 대구의 여러 지역이 금호강의 범람원이다. 범람원은 하류 지역에서 하천의 범람으로 운반된 물질이 하천 양안에 퇴적되어 형성된 평탄 지형을 말한다. 금호강의 범람원에는 북구 노원동, 동구 지저동, 입석동, 검사동 등이 있다. 

참고문헌 및 자문

김감영 교수(사범대 지리교욱)

지리로 읽는 대구 이야기(송언근)

대구 이야기(김종욱)

전영권의 대구지리(전영권)

대구新택리지(거리문화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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