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친근하지만 거친 형을 한명 알고 있었다. 형은 평소엔 차분하지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불같이 화를 낼 줄 아는 그런 형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내 인식을 크게 바꾼 일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형과 지하철을 함께 탔는데 쇠약해 보이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다리를 심하게 떠셨고, 지하철이 멈추거나 출발할 때 흔들리는 작은 진동에도 거의 쓰러질 듯하였다. 손잡이를 잡을 때 드러난 앙상한 손목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지하철 안은 평소보다 혼잡하여 남는 자리는 없었다. 그 지하철 안에서 유별난 점이 있다면, 한 청년이 노약자석에 자리 잡은 채 지하철이 울릴 정도로 통화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형은 그를 유심히 보더니 역을 두 개쯤 지날 때 즈음 그를 불러 큰 소리로 다그쳤다. 뻔히 앞에 힘들어 하는 어르신이 계시는데 젊은 네가 그렇게 행동해서 되겠냐고. 형의 목소리는 상당히 커서 지하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그는 상당히 무안해하며 사과했고, 다음 역에서 슬그머니 내렸다. 그 노인은 미안해했고 또 고마워했다. 하지만 그 당시엔 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 자리에 잠시 앉았던 것이 뭐 그리 큰 죄라고?  

몇 년 후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고, 생각보다 형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줄을 새치기하는 사람을 보아도 그들은 아무 말 하지 못했고, 도와 달라는 누군가의 요청을 듣지 못했으며, 옆에 사람이 쓰러져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서는 사람보다는 침묵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말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불의에 대해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내가 보기에 잘못된 것을 알아도, 이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어려웠다. 누군가 말하겠지 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가 말할 기회를 놓쳐버리기 일쑤였다. 그 사건 후 나는 바뀌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하여 말하려고 노력했다. 형처럼 강하게 밀어붙이지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 방식대로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그에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라고 말할 수 있다.

김주현(과기대 자동차공학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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