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저마다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있지만, 국민 대다수가 이견 없이 꼽는 인물이 있다. 바로 세종대왕이다. 경기도 여주는 세종대왕이 잠들어있는 땅이다.군에서 시로 승격된 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여주는 인구 10만의 도시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는다. 영릉으로 가는 버스도 많지 않은데, 터미널 앞 정류장에서 2시 50분에 출발하는 952-2번을 놓치면 곤란하다. 영릉에는 끼니를 해결할 만한 곳이 없으므로 터미널 부근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자.시가지를 벗어나서 20분을 달리면 사람의 흔적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세종대왕릉 입구 정류장에서 내리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사방 어디에도 건물이나 이정표가 없고 심지어 인도도 없다. 침착하게 도로를 횡단해서 마을길로 들어가 왼쪽으로 걷다보면 곧 진짜 입구가 보인다. 관람료 500원을 지불하고 입구로 들어서면 재실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다. 재실은 능 근처에서 제사음식 장만 등 제사를 위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입구에 있는 재실은 효종릉의 재실이다. 이곳 여주의 영·녕릉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뿐만 아니라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도 합장돼 있다.아버지 인조와 형 소현세자가 청 태종에게 당한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림)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 집권기간 내내 북벌을 꿈꿨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한 왕 효종의 묘지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옛날에 ‘마음을 같이 하는 신하가 한둘만 되어도 도움이 된다’했는데 지금은 너나없이 덩달아 눈앞의 이익만을 꾀하고 있으니, 나와 함께 일을 할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고독하게 북벌을 고수했던 왕의 답답함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문장이다.효종릉과 인선왕후릉은 봉긋한 언덕 위에 있는데, 정자각을 관통해 이들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엄숙해진다. 가만히 보기만 해도 경건해지는, 왕의 묘란 이런 것일까.효종릉을 뒤로하고 수라간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산책로가 보인다. 바로 세종대왕릉과 직접 연결된 길이다. 두 왕의 재위기간이 200년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을 떠올리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까지 든다. 세종대왕의 탄생일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모른다. 5월 15일이 스승의 날이 된 이유는 세종대왕의 탄생일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세종대왕릉과 소헌왕후릉은 효종릉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릉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설치돼있어 이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 조선을 빛냈던 왕의 묘를 지나 홍살문을 건넌다. 곧 재실과 세종전, 세종대왕동상이 보인다. 세종전 주변에는 혼천의 모형이 있어 소소한 볼거리를 준다.영릉을 둘러보고 나오면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이곳 시간은 무시해도 된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아 담당 기관에 연락을 하면 버스가 없을 때도 있다는 무책임한 답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크게 걱정하지 말고 콜택시를 부르자. 같이 버스를 기다리는 여행객이 있다면 비용을 더 줄일 수 있다. 다음 목적지인 신륵사는 택시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데, 이곳에서 보는 남한강의 경치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 저편에는 4대강 공사의 흔적이 보인다. 완벽한 한 폭의 풍경화에 누군가가 짓궂은 장난을 쳐놓은 것 같다.택시기사가 그 동네 맛집을 가장 잘 안다는 말이 있다. 신륵사 관광지를 나오면 길 건너 ‘오박사네 칼국수’집이 보이는데, 여주쌀로 만든 백반은 여행의 마침표가 되어준다. 세종대왕 이후로 모두가 인정하는 존경받는 지도자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타까운 고민은 대구에 도착해서도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옥동진 기자/odj12@knu.ac.kr

▲신륵사 강월헌 앞, 세월호 추모 리본이 달려 있다.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