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무책임한 대통령과 언론 윤리를 버린 KBS에 실망한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극우파에 맞서는 소녀상?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무력 투쟁도 불사했던 광주 시민들? 내 삶만 해도 힘든데 더 어지러운 세상을 확인하려니 좀 무겁게 느껴지는가?얼마 전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를 읽었다. 88쪽의 적은 분량(원서는 34쪽!)이지만 제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맞섰던 투사의 레지스탕스 정신이 꽉꽉 담겨 있는 책이다. 투사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사회운동가로, 일생을 저항하며 살아 온 스테판에게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감명을 받았다. 젊은이들은 그를 이어 불합리한 사회에 분노를 표출했고 그들의 분노는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러나 나는 책을 다 읽고도 분노하라는 외침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분노라는 감정의 짙은 농도와 그에 뒤따르는 의무가 부담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강렬한 의지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 과격한 몸부림이 뒤따라야만 할 것 같은 느낌. 평온함을 추구하는 내 몸뚱아리는 다이어리에 책의 좋은 구절을 옮겨 적는 것으로 만족했다.하지만 내가 근래에 만난 사람들 중에는 분노를 부추기는 사람이 많았다. 프랑스 젊은이들의 68혁명을 얘기하며 우리나라의 근대성을 비판하는 교수님, 삼성의 양면성에 대해 가차 없는 말투를 숨기지 않는 김태윤 감독, 대학 구조조정으로 학과가 없어진다는 소식에 걱정하는 생과대 친구. 그들을 보며 다시금 가슴에 분노가 일렁였다. 평소 같으면 꼬물꼬물 다이어리를 꺼내는데 그쳤을 테지만 이번엔 보다 나은 방법을 하나 찾았다. 바로 질문하기다. 굳이 몸을 움직이려면 손만 살짝 들면 된다. 정말이지 평온한 분노다.하지만 속은 격렬하다. 의심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한 번 뒤집어 보는 것은 분노의 발판이 된다. 끊임없이 의심하며 자기 자신, 친구, 사회, 세상으로 점차 확대된 대상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이 행동이 옳은 행동인지, 한 가지 시점에 매몰돼 치우친 눈으로 사건을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어디인지 계속 생각한다. 그것들과 생각을 나누며 힘껏 열을 내고 나면 그 뒤에 남는 것은 자신감이다. 내가 나를 알기 때문이다. 당장 광장에 나가 시위를 하고 대자보를 휘갈겨 쓰지는 않지만 내 주변에 고민하는, 작은 것부터 하는 거다.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기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많으면 나서지 못하는 소심함과 질문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아는 게 없어서 못 하는 무지함에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변하고 싶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다.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분노가 부담스러운 사람에겐 질문하기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질문들이 답을 내고 그 답들이 모여 변화를 이끌어내는, 그런 작은 실천부터 버릇을 들이는 것 말이다. 그리고 나는 멈춰 있어도 어차피 세상은 핑글핑글 돌아간다. 어지럽지 않으려면 나도 같이 돌아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 대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빙글빙글 춤을 추며 돌 수 있지는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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