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다. 센트럴파크에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가벼운 담소를 나눈다. 찬란한 봄, 만물이 꿈틀대는 계절이다. 하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따뜻한 봄은 아니다. 몇몇 학생들이 본관의 차가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총장실 안, 학부의 존폐를 걱정하는 학생들의 대화는 무겁고 심각했다. 현재 교정은 어느 누구에게는 찬란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슬픔의 봄이다.글로벌인재학부 폐지 과정에서 학생들과의 대화는 전혀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만개하지 못한 꽃들은 총장실로 몰려갔다. ‘아니, 그동안 소통이 부족하다고 열린 학생총회가 엊그제인데…’ 분노를 터트렸다. 총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들에게 캠퍼스의 봄은 생동이 아닌 몰락의 계절이었다. 본부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고집은 아니다. 그러나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데 급급하다. ‘처음부터 그런 학부를 왜 두려했는지 모르겠다’며 ‘5년도 내다보지 못한 기획 입안자는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합당한 대안을 도출하는 소통의 과정이다.소통의 부재가 비단 글로벌인재학부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 완료된 학사제도의 개편과 전과 제도 문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상주캠퍼스의 유사학과 통폐합, 지방대학 특성화사업으로 인한 단대 구조조정만 봐도 대화는 없다. 학생들의 생활을 송두리째 바꿀 문제들이 논의되고 있지만, 그 흔한 공청회조차 열린다는 소식도 없다. 학교와 학생간의 소통 범위는 그저 학교 상징 동물을 소로 할 것인지, 까치로 할 것인지 정도다.적막한 학교에 소통의 봄이 오는 것은 아직까지 먼 미래인 듯하다. 그나마 남은 희망은 조만간에 있을 총장 선출인가. 고작 학생 1명이 들어가는 유명무실한 가짜 조화에서, 학생총회로 학생 인원이 늘어나 진짜 생화가 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 이제 이만한 희망조차 없다면 그 길고 고요한 겨울을 집요히 버틴 소통의 씨앗에게 미안한 일이 아닌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걸어본다. 김영랑 시인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노래하며 봄이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시는 시, 현실은 현실. 더 이상 기약 없는 봄을 무작정 기다리고 싶지 않다. 이제는 피다 진 꽃을 보며,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기고 싶지 않다. 조개처럼 다문 본부의 입이 총장 선출이 있는 뜨거운 여름이 돼서야 열린다면, 봄을 잃은 학생들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이미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소통하자.

윤석현(경상대 경제통상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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