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인류는 그리스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속도와 힘의 관계 그리고 진공에 관한 설명의 오류들을 수정하면서,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의 출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과학혁명의 시대, 그리고 곧 이어진 인간의 이성을 과신했던 계몽주의 시대와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낭만주의를 통하여, 이성과 감성의 상극을 경험하게 된다. 계속해서 인류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생산력의 증대를 이루면서 빈부격차문제, 노동문제, 그리고 도시환경문제와 같은 다양한 사회문제에 기인된 진통과정을 겪는다. 한편 산업혁명과정을 거치면서 과학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발전을 해 나아갔다. 특히 철도나 선박과 같은 수송에 필요한 교통 분야 즉, 에너지(동력)를 사용하는 기술과 과학 분야부터 발전했다. 그리고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뒤따른다. 과학발전의 내용도 그러했다. 먼저 에너지에 관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그 뒤에 정보이론(엔트로피개념)의 개념이 뒤따랐다.

요즈음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과거에 비하여 개인 간의 통신 여건이 현저하게 개선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산업혁명시대를 겪은 후 1, 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의 시대를 지나 동구권의 몰락이라는 큰 사건을 체험한 후의 현재의 시대를 규정짓는 ke키워드로서 ‘정보통신시대’라는 단어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현재의 정보통신기술발전의 원동력은 전기와 자기학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현재를 바라보는 역사적인 시각을 갖추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관련과학 또는 과학적 사고방식 특히 전기와 자기학 분야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해당시대의 문화사를 병행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미 발간된 경북대 신문(1527) 호에서 18세기까지의 전기학과 자기학의 발달 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이전에 축척된 전자기학이 19세기의 서구 산업혁명에 어떻게 기여하게 되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우리나라, 특히 조선 말 전기와 자기학 관련내용과 유무선 통신기술이 도입된 역사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서구 산업혁명의 원동력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와 18세기 계몽주의 및 이성의 시대를 겪어오면서 19세기에는 근대 시민문화가 성숙되면서 과학의 세기로 불릴 정도로 열역학분야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한다. 전기와 자기분야에서 특히 그러했다.

이미 두 전하체 간 작용력과 두 자극 간 작용력도 뉴턴의 만유인력법칙과 같이 두 작용물체 간 거리의 역자승에 비례한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그러나 아직도 전기와 자기현상 간에는 어떠한 관련성도 관찰되지 않은 채 서로 독립된 현상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전기현상과 자기현상 간에도 어떤 연관성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지속적인 탐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합적 지식에 대한 부단한 탐색은 기원전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지적 풍토이기도 했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첫 연구는 1819년 덴마크의 외르스테드에 의하여 행해졌다. 칸트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코펜하겐 대학의 물리화학 분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도선 주위에 도선방향으로 놓인 나침반의 바늘이, 도선에 전류를 흐르게 하는 순간 도선의 방향에 수직한 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하체의 움직임의 결과로서 전류가 자석(나침반의 바늘)에 힘(회전력)을 가하게 되는 이른바 전류의 자기적 효과를 역사적으로 처음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전기와 자기분야의 또 다른 중요한 연구결과로서 1827년에는 금속에서의 열전도현상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전류를 연구해 왔던 독일의 옴(1787-1854)은 전기에 대한 명확한 개념과 용어를 체계화하여 옴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841년에는 줄(1818-1889)은 전류의 열적효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열적인 에너지와 기계적인 에너지가 동일하다는 사실이 카르노(1796-1832)에 의하여 1824년에 밝혀지고 보다 일반적인 에너지보존법칙은 1847년에 독일의 헬름홀쯔(1821-1894)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한편 1856년에는 독일의 웨버(1804-1901)와 콜라우쉬(1840-1910)는 진공의 유전율과 투자율의 곱의 제곱근의 역수가 빛의 속도와 동일함을 보여주고 또한 키르히호프는 1857년에 전기도선을 지나는 전기적 신호의 속도가 광속으로 전파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웨버와 콜라우쉬의 결과를 사용하여 밝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1860년대에 이르러 광학과 전자기학의 연관성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들 간의 연관성을 매듭짓는 이론적인 단계는 맥스웰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빛 또한 전자기파의 일종이라는 맥스웰의 이론이 헤르쯔에 의하여 실험적으로 검증되면서 곧바로 이탈리아의 마르코니에 의하여 무선통신실험을 통하여 인류에게 무선통신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실제로 유선통신이 무선통신에 비하여 훨씬 먼저 실용화되었다. 볼타전지가 개발되고 더욱 안정된 전지가 나오면서 육상에서의 유선통신의 실용화가 가속화되고 영국의 식민활동이 확대되면서 해저케이블을 이용한 전신선이 가설되기 시작했다. 1851년 영국인 그랫트에 의해 영불해협에 약 50km의 해저 전신선이 가설되면서 새로운 정보통신 수단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53년과 1856년 사이에 흑해에서 크리미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이 승리하는 데는 지중해를 횡단하는 해저전신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저전신선의 출현은 전쟁뿐 아니라 전신사업의 형태에도 영향을 미쳤다. 1851년 당시 영불해협을 건너는 통신수단은 주로 전서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해저케이블 부설로 새로운 비즈니스가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인 모르스가 유선전신을 발명하여 영불해협에 이어서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대서양 횡단 해저케이블이 가설되었다. 1865년에 해저케이블의 제조방법이나 송신펄스의 지연시간에 대한 이론적 자문을 해준 사람이 다름 아닌 캘빈경(원래 윌리엄 톰슨 1824-1907)이었다. 그리고 1876년에는 미국의 벨이 전화를 발명하여 실용화되기 시작했다. 뒤에 마르코니의 무선통신 서비스가 나오기 전까지 독점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3. 우리나라 유무선통신의 역사

우리나라에 유선통신을 위하여 최초로 가설된 해저케이블로는 1871년 영국의 거문도불법강점시에(거문도 사건) 건설했던 상해와 거문도 간 해저케이블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육지로 연결되어 최초로 가설된 전선은 1884년 2월 부산포에 일본 전신국이 설치되면서 부산과 일본 장기(나가사키) 간에 가설된 해저케이블이었다.

한반도 육지내부에 유선통신으로서의 전신이 최초로 도입된 것은 서울과 인천 간의 서로전신선이 가설되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한성전보총국이 개국되어 업무가 개시된 1885년으로 갑오경장이 일어나던 해였다. 이 서로전신선은 인천에서 서울을 거쳐 의주에 이르며 계속해서 중국의 봉황성을 거쳐 다시 천진이나 북경으로 연결되고 다시 유럽으로 전송되는 국제전신의 성격을 띤 것으로 이 중에서 인천과 서울구간이 먼저 개통된 것인데 이러한 전신선을 통하여 유선통신이 개통된 날짜가 『백범일지』에 1896년 음력 8월23일로 나와 있다. 당시 백범선생은 동학의 젊은 접주로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있다가 인천까지 전화가 개통된 지 3일후에 전화로 사면령을 받았는데 만일 서로전신선이 개통되지 않았더라면 예정대로 형 집행이 되었을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서로전신선에 이어 1888년 6월 1일에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남로전신선(공주와 전주, 대구를 거쳐)이, 그리고 3년 뒤 1891년 6월에는 서울-원산 간에 북로전신선이 가설되는데 이때는 청일러 삼국이 한반도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서양의 근대과학기술의 불모지였고 초보적인 과학기술일지라도 일부 실학자나 천주교신자 사이에만 제한적으로 알려진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에 전기 분야의 소개가 이루어진 것은 1866년 혜강 최한기에 의해서다. 그는 성리학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을 한 반면 서양의 자연과학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다산 정약용을 포함하여 앞서간 실학자들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한편 다가오는 개화사상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적 역할을 했던 진보주의자로서 개국통상을 주장했던 혁신적인 선각자였다. 1866년은 우리나라에 전신이 도입되기 약 20년 전으로 앞에서 다룬 외르스테드, 앙뻬르 그리고 패러데이의 연구내용을 일본이 아니라 중국을 통하여 빨리 도입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편 1883년 10월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인 한성순보 제 4호(1883년 11월 30일)에 논 전기라는 기사에서 그리스의 탈레스의 정전기 발견에서 볼타의 전지발명 등의 전기이론을 포함하여 앙뻬르와 헨리의 연구결과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한국에 무선통신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1903년 5월경(추축) 월미도 등대가 무선전신시설과 함께 가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인 광제호에 무선설비가 도입되었다면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선박 무선국이 되는 셈이다. 어쨌거나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으로서의 광제호는 대한제국, 일제통감부, 일제강점, 2차대전, 일본억류로 이어지며 1905년 이후에 일본소유로 운항되다가 홀연히 사라지게 되는 비운을 맞았다.

4. 맺음말

현재의 정보통신 산업의 주요구성학문분야인 전기와 자기학에 관한 발전의 역사를 해당 시대의 문화사와 함께 구성해 보았다. 인류문화사에서 키워드인 과학혁명, 계몽주의와 이성의 시대, 그리고 산업혁명의 시대와 병행하여 전기와 자기학 분야의 발전과정을 다루었다. 전기와 자기학분야라는 분리된 영역으로 부분만을 다루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현재는 분명 정보통신시대임에 틀림없다. 정보통신시대로 들어오기 전에 인류는 에너지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이어서 정보화시대(엔트로피의 시대)로 발전했다. 따라서 현재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중요한 두 단어가 에너지와 엔트로피로 강조되도록 정리했다. 정보화시대는 엄청나게 개선된 통신환경을 우리에게 주었지만 산업화시대의 소외나 고립과는 질적으로 다른 소외와 고립을 주고 있다. 그렇다. 지금의 정보통신사회는 불필요할 정도의 잉여 정보의 늪에 빠져 지쳐있거나 아니면 한 개인의 정보의 노출이 너무 심한, 그래서 한 개인을 통제하기가 용이한 상황이다. 따라서 각 개인이 피폐할 때까지 소진되게 하여도 각 개인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귀결되도록 하는 그러한 사회로 향해가는 것은 아닌지?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조영기 교수

(IT대 전자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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