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볼이 가득 담겨 있는 풀이 생각나는가? 조금 규모가 큰 백화점이나 음식점 등에 있는 놀이풀은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면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 나기 때문에 대여섯 살의 어린아이들에게 썩 인기가 좋은 놀이기구이다. 나의 오랜 친구 중 한명은 그 놀이풀에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그 속에 밀어 넣는 것을 즐겼다. 그로 하여금 이 지독한 놀이를 멈추게 한 것은 그 아이가 가진 트라우마, 즉 어릴 적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을 하고부터 발밑이 확실하게 닿지 않는 곳에 들어가는 것을 엄청나게 두려워한다는 것을 들은 이후였다. 도대체 트라우마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 왜소한 아이로 하여금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아이들 넷을 한꺼번에 밀쳐낼 만한 힘과 공포를 갖게 했던 것일까●

트라우마를 전문 언어로 정의하기 전에 한 사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초기 저서 『과학적 심리학 초고(1896)』에는 심적 고통으로 프로이트를 찾은 엠마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사람이 많은 곳, 특히 옷가게 같은 곳에 들어가는 것에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그녀는 ‘광장 공포증(agoraphobia)’에 시달리고 있었다. 옷가게의 점원들이 웃으며 엠마를 반기자 그녀는 이유 없이 옷가게에서 허겁지겁 도망쳤다. 프로이트는 이 여성의 심적 질병의 원인을 그녀의 숨겨진 과거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여덟 살 때 우연히 들렸던 한 옷가게 주인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경험이 있었다. 당시 그 상점의 주인은 웃으면서 그녀의 성기를 만지는 등의 추행을 저질렀고, 이 사건이 훗날 그녀에게 사람의 웃음 혹은 옷가게에 대한 회피를 유발한 것이다. 당시 엠마는 성적 분별력이 아직 확실히 자리잡지 못한 여덟 살짜리 꼬마였다. 때문의 당시의 사건은 또렷한 기억으로 남기보다는 강한 ‘충격’으로서 기억 저편으로 잠재돼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 『과학적 심리학 초고』에서 과거와 유사한 상황이 현재에 반복될 때 잊혀진 기억이 환기된다는 것을 말했다. 즉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웃는 점원’이나 ‘옷가게’ 등의 자극은 과거 이와 유사한 상황 속에서 심리적 상처를 입은 엠마 같은 사람들에게는 잊혀졌던, 혹은 억지로 기억 속에서 지웠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단초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이 겪었던 과거의 심리적 충격과 이와 유사한 현재의 자극이 결합하여 한 병인(病因)을 완성할 때 나타나는 심리적 불안이나 장애 등을 통틀어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트라우마의 치유』를 저술한 Jon G. Allen에 따르면 트라우마 연구영역에서 ‘사건’은 심적 폭력이 가해진 심리적 상처로, 지속적인 파급효과를 미치는 것을 뜻한다. 위의 성추행과 같은 사건을 ‘외상’이라는 용어로 정의할 수 있다. 그는 이어 그가 외상이라고 부르는 사건은 지속적인 부정적 결과를 불러오면서 과거를 현재 속으로 끊임없이 침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시사했다.

트라우마의 증상 대중매체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트라우마의 증상은 트라우마 경험이 소생하는 ‘플래시 백’ 이다. ‘플래시 백’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로 환기되는 것을 뜻하는데, 다소 가벼운 회상에서부터 심한 경우 과거 외상 경험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가 환각으로 나타나는 사례도 있다. 특정 외상을 겪은 사람들은 그 외상 혹은 그 외상의 원인에 강력한 두려움 혹은 무력감을 느낀다. 예를 들자면, 어린 시절 권위적인 부모에게 지속적인 학대를 받았던 아동의 경우 성인이 된 이후에도 권위적인 상사나 혹은 자신의 상위자에게 대들거나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지나친 두려움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가 아버지가 됐을 때 과거 학대받던 자신의 모습이 환기돼 자신의 아이에게 아버지와 똑같은 학대를 가한다.

이와 같이 외상 경험자는 자신이 겪은 외상 경험에 대해 공황, 공포, 격노, 절망과 무감각, 공허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번갈아 겪으며, 이는 심리뿐만 아니라 신체적 건강마저 위협한다. 위와 같이 외상 상황과 유사한 상황을 겪은 이후 외상 경험자들은 지속적인 공포반응을 일으키는데, 이는 과거와 유사한 상황을 피하려는 정신적 반응이다. 이와 유사한 원리로 일상생활 중 뚜렷한 이유 없이 극심한 두려움의 호소나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이상행동을 하는 행위 등을 우리는 공황발작이라 한다. 공황발작을 겪은 사람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외상과 스트레스가 흔한데,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의 경우 공황발작을 겪을 확률이 비교적 높다. 이는 외상 상황에서 겪었던 극심한 두려움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요인들로 인해 사전 전조 없이 갑작스럽게 환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외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의 장애를 동반하는 것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한다.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PTSD는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죽음 또는 심각한 상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신체적인 안녕을 위협하는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극심한 공포, 무력감, 두려움이 동반하는 장애이다. PTSD를 겪고 있는 사람을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전쟁터인데, 실제로 배트남전에 참전한 군인 1/3 이상이 PTSD를 겪었고 배트남전이 끝난 후 20년 지나도 일부 전역자들은 지속적으로 심적 고통을 호소하였다. 전쟁터에서 겪는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는 여러 사건들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던 기억, 즉 외상으로 남아 전역 이후에도 생활 속 혹은 꿈속에서 환자들을 괴롭힌다. 일상생활 중 간헐적으로 환기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들로 하여금 수면장애, 공황장애, 우울증 등의 질병과 함께 폭력성이나

무력감을 동반하기도 한다. PTSD를 겪는 환자들은 간헐적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뇌에서 평소보다 많은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흥분상태를 유지하는데 이런 흥분상태가 장시간 지속되다보면 아드레날린 분비 주기가 비정상적으로 바뀌어 정서를 통제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최후엔 기쁨이나 슬픔 등의 일상적인 감정조차 느끼기 힘들어져 자신이 정말 살아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에 고통스러워한다. 일상적인 생활이 붕괴되며 끝에 가서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한다.

굳이 전쟁터까지 가지 않아도 PTSD를 겪는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소방서에 근무하는 소방관들을 꼽을 수 있다. 김성곤 교수의 『소방공무원 안전사고 원인분석 및 대책』에 따르면 현직 근무 중인 소방관 대부분이 출동 당시의 긴장과 사건현장 수습에 잇따르는 스트레스 때문에 수면장애나 공황장애를 겪은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흉기를 소유한 흉악범죄자와 교전경험이 있는 경찰관들이나 지형이 험한 관광지의 해상구조요원 등 생명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직장에 근무하는 근무자의 상당수가 PTSD를 겪은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트라우마 치료 이렇듯 트라우마의 증상은 일상생활 중 특정 상황에 대한 단순 회피행동에서부터 수면장애, 공황장애 등의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심각한 증세까지 그 종류와 원인이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정론화된 치유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상담치료사들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개인의 자기조절을 통해 이 트라우마를 약화시키거나 물리치는 방법을 택했다. 외상 경험의 환기로 인해 트라우마가 재발될 때 자신의 생활주기를 안정시키거나 자신이 ‘현재’ 느끼고 있는 정서반응을 깊게 되새기는 것으로 정서의 폭발(분노)이나 반응적 정서(두려움이나 수치)등이 끼치는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트라우마로 인해 발생된 분노, 두려움 등의 자기 파괴적 정서를 자신 스스로 평가하면서 외상으로 환기된 과거 ‘나’와 현재의 ‘나’를 분리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트라우마 때문에 정서적으로 불안한 자신을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상황을 분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트라우마 치료의 첫 걸음이다. 물론 주변 환경이 자신의 외상 경험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면 그 원인을 찾아 개선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다.

홍태양 기자/hty12@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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