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보다 자신에게 더 관심을 둔다. 물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을 더 아끼고 만족시키는 것이 본능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런데 이 본능적이고 인간적인 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영국의 NEF(The New Economics Foundation, 신경제재단)란 곳에서 2009년 HPI 2.0(the Happy Planet Index 2.0)을 발표했다. 기대수명과 삶의 만족도, 친환경성을 바탕으로 국가별 ‘행복지수’를 산정했다는 것이다. 2009년 세계은행이 발표한 1인당 명목 GDP가 17,078달러로, 조사된 164개 국가 중 32위를 기록했던 우리나라의 행복지수 순위는 어떨까? 조사대상 143개국 중에 68위. 행복은 성적순(경제순)이 아니라더니 정말인가 보다. 도대체 행복이 뭐길래 저 멀리 부탄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 내가 덜 행복하다는 것일까.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란 책은 불행의 원인과 행복의 조건에 대해 다룬다. 사회제도 등 외부적 환경은 제외하고 개인적인 심리만을 다룬 이 책에서,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하는 본성은 질투이다. 도민준 교수도 질투를 인간의 가장 저급하고 치졸한 감정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바로 다른 일들 때문에 생기는 긴장감을 풀어줄 수 있는 여러 분야에 대한 ‘폭넓은 관심’이다. 어떤 것에 관심이 생기는 순간, 인생은 권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앞길이 구만 리 같다’는 말이 아직 젊어서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만큼 세월이 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살아가야 할 길이 저 멀리 막막하게 펼쳐졌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렇게 권태로움에 빠져 세상에 대한 관심은커녕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무뎌질 무렵, 나는 경북대신문에 들어왔다. 벌써 1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내가 학생기자를 하면서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폭넓은 관심’이다. 그동안 나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던 총장직선제, 학생들의 생활, 앞으로 있을 학생총회 같은 것들이 점점 더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내 세상 속에서 내 속도에 맞춰 살며 만족감을 느끼던 내가 달리기도 하고 기사 걱정에 잠 못 이루기도 한다. 행복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 있고 진짜 ‘살아 있음’이 뭔지 알아가고 있다. 우리는 심장이 뛰고, 생각을 하며, 숨을 쉬니 스스로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또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 위해 세상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떨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세상 사람들에 대한 관심만 있으면 된다. 나아가 다른 것에 대한 아픔을 공유할 줄 알고, 다른 것에 대한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결코 불행해질 수 없다. 그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하려는 마음 자체로 행복이다.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러셀의 말을 믿어보자. 나도 독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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