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이 문화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문학은 픽션이다. 그리고 그 픽션의 힘을 가장 극대화시키는 것이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상상력의 영역 안에서는 강력한 주권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세계화」의 바람과 인터넷의 발달에 의해 네트워크 미디어나 멀티미디어 문화에 픽션이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의 영역을 점차 내어주고 있다. 냉전시대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어느 한 쪽의 선택을 강요당했던 시대를 벗어나 상상력의 영역으로 뛰어보기도 전에, 그냥 발판위에 선 다이빙 선수를 쳐다보는 관객의 위치에 서 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우리 사회, 특히 문학을 직접적인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문학계가 잊혀져가는 문학의 상상력을 되찾기 위해 한 노력은 문학 그 자체를 중심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계화」로 잘 포장된 「세계문학」을 문화로서 수용하여 그 속에서 우리 문학이 가진 상상력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90년대부터 시작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작품의 중첩되는 출판 러쉬와 그로인한 「하루키 열풍」이다. 이 시점부터 하루키와 우리사회는 노벨문학상에의 갈망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를 넘어서 더욱 심화되었다. 문학이 문화로 읽혀지는 시대, 그러한 거대담론의 변주 속에서 필자는 지금 문학이 가지는 상상력, 그것을 향한 노스텔지어를 하루키가 아닌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한다면, 오에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하고 있는「산골마을」이나 화자인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은 단편적인 일상의 나열을 그린 인류 보편적 특성 혹은 일본이라는 특수성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일상과 픽션이 만들어낸 비일상이 이질적인 특성을 가진 세계관 속에서 마블링처럼 혼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의 이야기는 이질감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어져 온다. 또한, 그러한 이질감이야말로 문학이 가지는 상상력의 영역 그 자체의 순수함이며, 건설되지 못한 유토피아의 좌절이 아닌 헤테로토피아(혼재향)로서 공존하는 현재이다. 때문에 그러한 혼재의 공간을 오에의 소설을 통해 공유하는 새로운 독자층의 창조가 앞으로의 한국사회에 필요하다고 본다.

2. 하루키 vs 오에: 문학적 텍스트 vs 문화적 텍스트

사실, 한국에서 소설가로서 오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94년도에 일본에서는 두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에의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 중, 한국에서 번역되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그 독자층 또한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설가가 아닌 오에에 관한 우리 사회의 담론을 살펴보면, 특히 오에가 발신하고 있는 정치적인 발언이나 사회운동은 한국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아들 오에히카리(大江光)가 사회에서 하나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다하며 공존할 수 있도록 서포트 하면서, 작가로서 자신의 일과 히카리를 음악가로 이끈 석세스(success) 스토리로서 많은 미디어에 의해 소개되었다. 요컨대, 한국에서 오에의 위치는 오에의 소설이 아닌 「오에 겐자부로」나「오에 겐자부로의 인생」바로 그것이「문화적인 텍스트」로서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노벨문학상이 문학으로서의 본질을 평가하지 않으며, 독자 역시 문학으로서 접근하지 않고다는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에서는 「하루키 열풍」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하루키 열풍」은 「세계문학」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거대담론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정형화된 하나의 문화 패턴을 개인적인 레벨에서 소비 하고 있다. 즉, 하루키 문학이 아닌 하루키 문화로서 독자들에게 소개되고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의 「하루키 열풍」은 1980년대, 일본에서 일어난 「하루키 현상」과는 그 진행이나 논의자체가 다른 벡터를 가진다. 왜냐하면, 일본에서는 「하루키 현상」을 상대화하는 존재로 오에가 존재했었기 때문에 두 개의 벡터는 출발점이 틀린 것이다.  「문화적인 텍스트」가 되고 있는 오에와, 「문학적인 텍스트」로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하루키, 이 두 작가는 현재 세계적으로 폭넓게 읽혀지고 있으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일본의 작가라고 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전혀 성질이 다른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문학비평이나 학문적 연구 영역에서도 상당한 온도 차이가 있다. 필자는 두 사람에 대한 이러한 차이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 형식의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동경대 교수이자 문학비평가인 가토텐요(加藤典洋)는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작품을 발표했던 1987년, 「이해 9월에 무라카미의 『노르웨이의 숲』이 출판되어, 다음 10월, 바로 이어서 오에의 『그리운 시절로의 편지』가 나왔다. 전자는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문학계에서는 비참한 악평에 부딪치게 된다. 한편, 후자는 일반적으로는 그다지 팔리지 않은 대신, 종래부터 문학을 읽는 사람, 소위 지식계층, 문학 연구자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으로부터, 가토는 「오에인가 무라카미인가」를 선택해야만 했던 이분법적 이항대립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두 작가를 만들어낸, 그 시대가 가지는 시대성이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두 사람에 대한 거대 담론을 형성해야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3. 하루키와 오에의 공통된 키워드는 새로움이다

가토가 언급하고 있는 오에의 『그리운 시절로의 편지』와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오에와 하루키에게 작가로서 하나의 전환이 되는 작품이다. 그 공통된 키워드는 새로움이었다. 「어떻게든 한번 통합하고 싶다」고 하는 오에와, 「한번도 쓰지 않은 종류의 소설」이라고 하는 하루키가 그리고 있는 이야기의 벡터는 각각 그 내포된 독자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에의 『그리운 시절로의 편지』에 내포되고 있는 독자는 이전의 작품을 별자리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별로 인식하고, 『그리운 시절로의 편지』를 더해 그 각각의 별을 「통합」해 전체의 연결된 이야기를 하나의 별자리로서 인식할 수 있는 기존의 독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반면, 하루키는 새로운 「연애소설」을 받아들이는 독자가 『노르웨이의 숲』에 내포된 독자인 것이다. 두 작가의 그러한 의도는 두 작품에서 보여지는 인용의 형태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운 시절로의 편지』와『노르웨이의 숲』에서는 각각 『신곡』과 『위대한 개츠비』가 중요한 이야기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먼저, 『노르웨이의 숲』의 화자인「와타나베」는 자신의 기억을 구성하기 위해 메타픽션으로서 『위대한 개츠비』를 인용하고 있다. 즉, 『위대한 개츠비』가 인용된 본질은 이야기의 대상인 「개츠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 하는 「닉」이라고 하는 화자에게 있다. 반면, 『그리운 시절로의 편지』에서의 화자인「K」는『신곡』의 본질적인 세계관을 「그리운 시절」로서 등장인물 모두와 공유하고 있다. 『신곡』과의 형식적 공통점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혹은 단테의 사후세계의 여행을 더듬어가면서, 그 인용을 통해서 자신의 기억을 이야기로서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제시하면서「개츠비」를 강요하지 않는「와타나베」는, 자신의 기억을 읽는 독자에 의해 다양한 공감을 발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렇게 화자로서 확고한 판단 여지를 남기는 여운으로 인해 독자 사이에는 동질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야기가 광장과 같이 독자에게 열려진 채로 있기에 얻어지는 그러한 보편적 동질성은 『노르웨이의 숲』이후, 하루키 문학의 특징이 되어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 폭넓게 소비되어 갔다. 하지만, 『그리운 시절로의 편지』에서「K」는 그리스도교적인 세계관에 속하면서도 그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단테의『신곡』을 이야기 형식으로서 수용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기억을 보편적인 본질로서 제시한다. 때문에 「산골마을」과「기형님」이라고 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본적인 특질 속에 『신곡』이 가지는 이질성을 보편적 본질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이 오에가 의도한 「통합」일 것이다. 따라서, 오에는 단테의『신곡』과 「나」의 이야기가 가지는 이질성을 그대로 연결시켜서 시대와 세대를 넘는 보편적인 동질성을 획득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4. 문학은 통속적인 보편성이 아니라 낯선 보편성을 담아내야 한다.

이상을 종합해서 결론을 말하자면, 한국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에와 하루키」라고 하는 거대담론을 한국문학에도 입힐 필요가 있다. 단 그것은, 「문화적 코드로서 수용된 세계문학의 하루키」와, 문학을 문학으로 읽음으로서 얻어지는 상상력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단서조항 하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이질성 가득한 「일본 문학의 오에」를 수용해야 하며 그러한 이질성을 공유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 때문에 먼저, 『그리운 시절로의 편지』를 그 출발점이 되는 작품으로서 독자들이 일독하기를 권한다. 사진출처: 조헌구 강사 제공

조헌구 강사 (인문대 일어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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