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개념의 본성과 기원에 대한 문제는 인식론의 긴 역사에서 제기된 핵심 문제이다. 말하자면, 이 문제는 플라톤에서 오늘날 분석철학에 이르기까지 2천년을 훨씬 넘는 논쟁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교사와 학생에게 있어서 개념의 문제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의 중요한 핵심들 중의 핵심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개념을 가르치고 이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작 교사들도 학생들도 개념 그 자체의 정의를 설명하라고 요구하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이에 개념의 정의, 기원 그리고 본성 등에 대한 인식론사적 논쟁들을 가능한 한 간략하고 명료하게 제시하여, 교육적 실천에 미력하나마 도움을 주고자 한다. 

2. 개념에 대한 경험론과 합리론의 논쟁

개념이란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이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이 개념이라는 용어를 어떤 상항에 적용하는가를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위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접근 가능한 질문으로 변형하는 것이 더 좋겠다. 우리는 언제 개념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누군가가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떠한 경우인가? 첫째, 어떤 단어 x에 대해서 화자가 그 정의를 알 때, 우리는 그가 x 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즉 어떤 사람에게 ‘사람이 무엇인가 ?’ 라고 질문했을 때, 그가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사람’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개념은 문제의 단어의 정의와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안은 때로는 편리하지만 다른 문제들을 가진다. 왜냐하면, 모든 단어들이 명료하게 정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통상 정의란 피정의체와 정의체로 구성된다. 그런데 어떤 용어들은 정의체를 갖지 못한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어, ‘사랑’, ‘평화’, ‘책상’ 등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설명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희다’, ‘푸르다’ 등의 용어에 대한 정의를 말로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다. 이에 두 번째 대안이 출현했다. X라고 하는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할 때, 그 때 그는 X 에 대한 개념을 가졌다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다. 어떤 아이가 ‘고양이’라든지 ‘개’라든지 하는 용어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을 때, 즉 이들 단어들을 상황에 맞게 사용할 줄 알면, 그 아이는 ‘고양이’나 ‘개’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개념의 문제를 그 개념을 실어 나르고 있는 단어의 사용법에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이 입장은 첫 번째 대안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장점이 있다. ‘푸르다’라는 용어의 정의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푸른 자동차를 보고 ‘저 자동차는 푸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동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안도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즉 여기서는 언어 기호 없이는 개념이 없다는 기호우선주의의 입장을 지지한다. 사실 이 입장이 오늘날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 언어학의 중요한 내용이다. 수적 개념들의 경우 또는 어떤 추상적 개념들의 경우는 이 대안이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가 ‘백’, ‘천’, ‘만’ 등의 기호를 먼저 배우고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수 개념들을 우리가 어떻게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만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즉 항상 기호가 먼저이고 그 뒤에 개념이 뒤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우리는 ‘희다’, ‘푸르다’ 등의 기호를 배우고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시각적으로 흰 색깔과 푸른 색깔에 대한 이미지 내지는 관념을 가졌다. 이에 대륙의 합리론자이나 이에 정 상반되는 영국의 고전적 경험론자조차도 우리는 우선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언어적 기호는 이러한 관념을 표현하기 위한 이차적인 기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관념사는 세 번째 대안을 제시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어떠한 단어나 기호도 가짐이 없이 단순히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태를 고려한다. 도대체 그런 경우가 어떠한 경우인가?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즉 우리가 흰 색을 푸른 색이나 검은 색으로부터 구분할 수 있을 때, 굳이 이들 개념을 지지하는 기호나 언어를 미리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기호의 도움 없이도 X를 X아닌 Y나 Z로부터 구분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X에 대한 개념을 가진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번째의 대안도 문제가 있다. 가령 개도 칠판과 분필의 차이를 지각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개도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는가? 좀 더 결정적인 예를 들면, 오늘과 같은 사업사회에는 과실 선별기와 같이 물건을 선별하고 구분할 줄 아는 기계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계들도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사실 X를 Y이나 Z로부터 구분한다는 상항이 X라는 개념을 도대체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를 해명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다시 네 번째로, 개념이란 정신 내적인 어떤 기준에 근거한다는 입장이 있다. ‘푸른 색’과 ‘흰 색’의 차이를 언어적 정의로 구분할 수는 없지만, 정신 내적으로 양자의 차이를 지각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푸른 색’을 ‘흰 색’으로부터 감각적 차이에 의해 감지하는 것 외에 '푸른 색' 그 자체를 독립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다. 말하자면, X라는 개념을 X가 아닌 Y나 Z로부터의 차이 지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이는 X 그 자체에 대한 긍정적 정의는 아니다. 즉 X 그 자체에 대한 정신적 기준이나 근거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국 네 번째의 대안은 다시 세 번째의 대안으로 되돌아간다.  이 네 번째의 대안이 합리론적 대안이라면, 세 번째의 대안은 경험론적 대안이다. 개념을 정신 내적 기준에서 해명하려는 것은 결국 선천 개념이나 이데아 등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러한 내적 기준은 그 자체적으로 모호하며, 따라서 그 기준의 명백한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하면 결국은 그것을 지각적 차이에로 환원시킬 수밖에 없다. 이에 합리론적 대안은 경험론적 대안에 비해 다소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합리론자는 나름대로 양보할 없는 논거들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개념은 단순한 ‘기호의 의미’에 포섭되지 않으며, ‘감각적 이미지’의 집합보다도 크다. 이처럼 개념은 한편에서 단어의 의미인 ‘정의’나 ‘사용법’을 지시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에 존립하는 정신 내적인 통일된 생각, 소위 ‘관념’을 지시하기 한다. 그런데 ‘관념’이라는 용어로 합리주의자들은 ‘선천적 관념’, 즉 ‘내포’, ‘논리적 보편자’, ‘이데아’ 등을 의미한다면, 경험주의자들은 이를 ‘감각적 이미지’ 또는 ‘경험 내용’ 등과 교환적으로 사용한다. 기호학의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기호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e)로 구성된다. 기호학자들은 개념을 ‘기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라는 용어는 의미, 관념, 이미지, 기의 등과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이제 개념에 대한 정의를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 개념은 구조적인 것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오늘날 등장한 구조주의 언어학에 따르면, 개념은 일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주어진다. 달리 말하면, 개념은 단순히 한 단어의 의미 내지는 사용법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문장적 지평의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이다. 예로, ‘돌’의 개념은 ‘돌’이라는 이 용어의 단순한 의미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돌’이라는 이 단어의 의미가 이 용어 자체에서 독립적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돌’이라는 이 용어의 의미는 이 용어를 포함하는 가능한 모든 문장들의 구조에서 주어진다.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그 구조는 ‘통합관계축’(la relation syntagmatique)과 ‘범례관계축’(la relation paradigmatique)이다.  ‘돌’은 무겁고 단단하고 차갑다.‘솜’은 가볍다.‘흙’은 따뜻하다.‘물’은 차갑다.‘모래’는 돌보다 적고 흙보다 크다.

여기서 문장의 가로 축을 구성하는 ‘무겁다’, ‘단단하다’, ‘차갑다’ 등을  ‘통합관계축’이라고 하고, ‘돌’, ‘솜’, ‘흙’, ‘모래’로 연결되는 세로축을 ‘범례관계축’이라고 한다. 결국, ‘돌’의 의미는 그 술어로 올 수 있는 ‘무겁다’와 이를 둘러싼 대비적 용어들인 ‘가볍다’, ‘차갑다’, ‘따뜻하다’ 등으로 구성되는 관계망과 ‘돌’, ‘흙’, ‘물’, ‘모래’ 등으로 구성되는 범례관계망으로 이루어지는 전체성의 구조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제 본고의 최종 결론을 줄 수 있다. 필자의 최종 결론은 개념, 판단 그리고 추론은 상호 순환적 의존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한 때, 단순한 선적 사유에 습관화된 학자들은 우리의 사유는 개념에서 판단으로 판단에서 다시 추론으로 발달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단어의 의미가 개념이고, 두 단어 이상을 결합한 문장이 판단이기 때문에, 판단의 가능성의 조건은 우선 개념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한 주어진 문장(판단 또는 명제)에서 새로운 문장을 도출하는 것이 추론이므로, 판단은 추론의 가능성의 전제 조건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개념 그 자체는 어떻게 주어진 것인가? 유아가 ‘돌’의 개념을 획득할 때, 어떠한 판단 작용도 없이 처음부터 직관적으로 원초적 돌의 관념을 획득하는가? 아니다. 최소한의 원시적 판단이 개입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의 판단은 우리 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판단을 완전히 습득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아니다. ‘돌’에 대한 아동의 개념은 처음부터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 경험들을 통한 수많은 판단활동들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판단 활동 그 자체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미리 전제된 명제나 판단에 의존함이 없이 어떤 판단을 독립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판단이라도 거기에는 일종의 추론활동이 개입한다. 거시적 관점에서, 개념, 판단 그리고 추리 사이에 변증법적 순환성이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미시적 관점에서, 개념들 그 자체 다시 주어 개념(실체)과 술어 개념(속성)으로 세분화되는데, 이들 양자 사이에서도 변증법적 순환성이 있다는 것을 지지하면서 구성된 논리학이 오늘날의 양화논리학(술어논리학)이다. 

문장수 교수 (인문대 철학)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