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이 없는 드넓은 우주 공간을 유영하다.                                                     

사진 출처: 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

1. 영화 그래비티(Gravity)영화 ‘그래비티(중력, gravity)’는 정말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아니 차라리 아무런 스토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도 볼 수 있겠다. 영화는 지구로부터 600km 떨어진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두 사람인데 사실 두 사람이 같이 등장한 것은 약 십여 분일 뿐이고 나머지 한 시간 반을 한 배우가 내내 연기한다. 그러나 그 영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나는 과학적 지식과 관련된 측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학적 차원과 관련된다. 과학적 차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단순히 지구 중력의 문제를 기술했을 뿐이지만,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하기에 충분하다. 이에 필자는 우선 이 영화를 소재로 중력, 곧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과가 왜 지구로 떨어지는가?’라는 문제에 관한 과학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무한한 우주 속에 단독자로 던져졌을 때 겪는 인간 고독의 의미를 음미하게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번 지면에서 필자는 우선 중력에 과한 과학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다음에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주는 두려움에 대해서 반성하고자 한다.

2. 아리스토텔레스와 장소이론태양을 중심으로 한 태양계 모델은 BC 3세기경에 아르타르코스(Aristarchus)에 의해 제안되었지만, 수세기 동안 서양인들은 태양과 다른 모든 행성들이 고정되어 있는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었다.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비로소 지구는 자체 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하며 태양을 중심으로 일 년에 한 번씩 공전한다고 주장했다. 16세기 후반 티코 브라헤는 일생동안 태양과 행성의 위치와 운동을 측정하여 많은 데이터를 수집했으며, 그의 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스승인 브라헤의 모든 관측들을 토대로 행성들의 운동에 관한 수학적 법칙들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모든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 운동을 한다. 둘째,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은 같은 시간 간격에서 같은 면적을 스친다. 셋째, 어떠한 행성이라도 그 주기를 제곱한 것은 그 행성과 태양 사이의 평균 거리의 삼승에 비례한다. 뉴턴은 케플러의 천문학 법칙과 지구에 관한 경험들을 토대로 그의 운동의 세 법칙을 적용하여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만유인력의 법칙(F㎰=Gmpms/r²)을 구성했다. 먼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공간을 그 유명한 장소 이론을 통해서 설명했다. 그는 우선 두 개의 절대적 장소를 구분했다. 이때 그 구분의 기준은 달이었다. 그는 달을 중심으로 ‘달 위의 장소’와 ‘달 아래의 장소’를 구분했다. 그리고 그는 ‘4원소설’을 통해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는 물, 불, 공기, 흙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각 원소들은 각자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가 있는데, 물과 흙의 고향은 달 아래의 장소 즉 지구이며, 불과 공기의 고향은 달 위의 장소이다.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에 의해, 공기와 불은 항상 위로 치솟는 상승 운동을 하고 빗물과 흙은 지상으로 떨어지는 하강 운동을 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사과가 지구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과는 물과 흙의 조합에 의해서 구성된 복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가 원탁의 테이블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여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너무 멀리 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 항해술의 발달에 의해 바다 끝까지 계속해서 항해했을 때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경험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 지점에서 똑바로 수평선을 직진했는데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고 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감각적 지각의 차원에서는 지구가 수평으로만 보이지만 논리적 관점에서는 구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지구는 구의 형상을 가진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3. 뉴턴과 지구중력 그런데 지구가 구라고 한다면 남반구에 있는 바닷물들은 우주 공간으로 떨어지지 않고 어떻게 지구 표면에 붙어 있게 될까? 그리고 칠레에 있는 사과나무의 사과들은 왜 우주 공간으로 떨어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질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던진 사람이 바로 뉴턴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뉴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상정해야만 했다. 즉 우주 속의 모든 천체들 사이에는 서로 간에 잡아당기는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인력이 질량이 클수록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중력은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고안했다. 따라서 이제 지구의 질량과 사과의 질량을 비교하면 지구가 사과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과가 지구로 끌려 들어오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구의 중력이 미치지 않는 대기권 밖의 물체들은 더 이상 지구로 낙하하지 않지만 대기권 안의 모든 물체들은 지구로 낙하하게 될 것이다. ‘그래비티’의 주인공인 스톤 박사는 지구 대기권 밖에서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다가 폭파된 인공위성의 잔해와 부딪히면서 우주 공간 속에서 미아가 돼버렸으며 다시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서 그녀는 지구 대기권 안으로 들어와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더 이상 지구 대기권까지 들어올 수 있는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중국의 우주정거장까지 접근하여 하나의 소형 우주선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우주선도 연료가 고갈되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우주선을 폭발시켜 그 때 발생하는 추진력으로 그녀가 타고 있는 소형 우주선이 지구 대기권 안으로 진입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기대하던 대로 소형 우주선은 대기권 안으로 진입되었고, 그 이후로 그녀가 탄 한 평 남짓한 컨테이너 박스는 지구 중력에 의해서 지구 표면으로 추락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모든 물체들이 지구 대기권 바깥에 있을 때는 지구로 추락하지 않지만, 대기권 안에 들어오면 지구 주위에 있는 지구보다 작은 모든 물체들은 지구로 추락하기 때문에 지구가 물체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만유인력’ 개념은 뉴턴의 근본적인 운동 원리에 모순된다. 왜냐하면, 뉴턴에 따르면 모든 힘의 전달은 오직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밧줄을 묶어서 돌멩이를 끌어당기거나 막대기를 돌멩이에 접촉하여 밀 수 있지 돌멩이와 나 사이에 어떠한 연결선이 없을 경우에도 내가 그것을 끌어당기거나 밀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4. 아인슈타인과 시-공간 곡률 이런 점에 착안하여 아인슈타인은 중력 개념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했다. 후자가 중력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은 바로 ‘4차원적 시-공간의 곡률’ 개념이다. 태양계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등의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일정한 주기로 회전하고 있다. 이때 이러한 행성들이 태양 안으로 추락하지도 않고 태양 바깥으로 튕겨 나가지도 않는 것은 태양이 끌어당기는 구심력과 태양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원심력 사이의 균형에 근거한다. 소위 모든 천체들 사이에 작용하고 있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하여 모든 천체들이 현재의 운동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물체들이 접촉 없이 서로 잡아당기거나 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 주변의 물체들은 지구로 낙하하고 태양계 주변의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중력의 문제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 그가 고안한 것이 ‘시-공간의 곡률’ 개념이다. ‘시-공간의 곡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메타포를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교실만한 크기의 보자기의 네 모서리를 네 사람이 잡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보자기 위에 100kg 정도 되는 쇠구슬을 놓는다고 하자. 그러면 쇠구슬이 위치하는 그 공간이 밑으로 움푹 파일 것이다. 이때 0.1g 정도 되는 작은 구슬이 동일한 보자기 위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작은 구슬은 큰 구슬이 만들어 놓은 곡률을 따라 흘러 내려갈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식으로 질량이 큰 물체는 주변의 시-공간에 곡률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그 주변에 있는 작은 물체들은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휘어진 공간을 따라서 직선하강운동을 한다고 가정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처음부터 모든 천체들은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직선하강 운동을 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시-공간의 곡률 때문에 어떤 물체들은 순환운동을 하는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다시 말하자면 태양계를 회전하고 있는 행성들이 태양 주변의 타원궤도를 따라 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3차원적 공간 직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간적 차원에 관한 이러한 문제를 보다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2차원적 공간 직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떤 유기체를 예로 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공간을 날지 못하고 땅으로만 기어 다니는 개미가 있다고 하자. 그는 전후 또는 좌우로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어떤 물체가 전후로 움직이는지 좌우로 움직이는지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미가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를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구라고 하는 일종의 평면 위에 만들어지는 그림자를 통해서라고 하자. 그는 그림자의 이동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물체의 운동 또는 정지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비행기가 수직으로 상승할 때는 비행기의 그림자는 동일한 지점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고, 따라서 개미는 그 물체가 가만히 정지해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3차원적 공간 직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태양계의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운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태양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모든 천체들이 다 같이 수직하강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의 직관 능력의 한계와 실험 장치들의 한계에 의존한다. 지구를 벗어나서 지구를 전체적으로 직관할 수 없던 시대의 사람들은 지구가 원탁과 같다고 생각했다. 단지 수평선을 계속 직진 운동 했지만, 결국엔 그들이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들이 일종의 대원을 따라서 원운동을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주의 공간은 우리의 눈에 보이듯 3차원의 공간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모습을 갖고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이를 ‘4차원적 시-공간’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3차원의 공간 형식과 일차원적 시간형식이라고 하는 두 가지 차원에 의해서 우주의 모든 파노라마가 전개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공간과 시간을 서로 분리되고 구분된 형식이 아닌 서로 융합되어 있는 단일 형식이라고 상상했다. 이에 그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하지 않고 ‘시-공간’(space-time)이라고 말한다. 이는 직선과 같은 1차원도 아니고, 면과 같은 2차원도 아니고, 입체와 같은 3차원도 아니라,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상상하면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4차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직관력은 물체들을 오직 3차원적으로만 표상한다. 때문에 4차원적 시-공간은 우리의 직관에 포착될 수 없고, 오직 기하학적 표상, 즉 수학적 표상을 통해서만 기술될 뿐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기술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원리’이다.이 이론은 시-공간의 기하학적 성질로 중력을 기술하고 있다. 시공간 내에서 입자의 운동은 가능한 한 가장 짧은 경로를 따르며 이때 그 경로를 측지선(測地線, geodesic)이라고 한다. 시-공간의 기하학은 질량과 에너지 분포에 의해 결정되며, 3차원 공간에서의 측지선의 투영은 반드시 두 점 간의 거리가 가장 짧은 경로와 일치할 필요는 없다. 아인슈타인은 태양 주변의 별빛들도 언제나 똑바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태양의 중력에 의해 만들어진 시-공간 곡률의 영향을 받아 휘어진다고 예견했는데, 영국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에딩턴은 1919년 5월 29일에 태양 주변에 있는 별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하여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사과가 지구로 떨어지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지구 중력은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기술되는 시-공간 곡률 개념에 의한 낙하 개념의 특별한 경우이다. 이러한 시-공간의 곡률의 효과가 극단적으로 크게 나타나는 영역이 블랙홀 영역이다. 따라서 블랙홀은 질량이 극단적으로 큰 물질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라고 하겠다. 이 때문에 그 주변을 스쳐가는 별빛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블랙홀’, 즉 ‘검은 구멍’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5. “이 우주의 무한한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다시 앞에서 제기한 영화 ‘그래비티’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영화는 적어도 두 가지의 의미를 주는 것 같다. 우선 이 영화는 도전 정신의 위대함에 대해서 말한다. 위에서 인용한 문구는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물론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신의 침묵에 대한 파스칼의 절규이다. 우리는 이러한 절규를 ‘그래비티’의 스톤 박사에게서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스톤 박사는 신을 절규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처한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여기에 위대한 인간과 평범한 인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극한적 상황에 처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느냐, 아니면 끊임없이 도망가는 피칭을 하느냐에 따라 얻게 되는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을 것이다.이 영화가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고독의 의미이다. 아마도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일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종교를 만들고 신을 만들고 천국을 창조했다. 죽음에 대한 반성은 한편에서는 무한한 불안과 공포를 우리에게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시적 감정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나 우리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시정을 갖기보다는 불안과 공포만을 가지며 가능한 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결국에는 죽고 말 존재라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한다면, 현재에 직면한 다양한 일들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일일뿐 결코 나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우리는 지금 여기에 무한히 집착하면서 감금되어 시름할 뿐이다. 이 우주의 무한함을 응시하면서, 죽음을 미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시정을 가진다면, 아마도 현재의 생의 중력으로부터 다소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문장수 교수(인문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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