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속에 ‘잠’조차 잘 수 없는 사회

모든 것이 열려 있는데 능력이 안 된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개인에게는 우울증이 찾아온다

지난 6일, 미국 ‘애틀란타저널’에서 “한국은 주말에도 일하는 나라”라며 “목표 달성을 중시하는 성과주의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1면 탑 기사를 냈다. 이처럼 현재 한국 사회는 성과주의 속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대학생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그들 또한 이런 성과주의 사회 속에서 성과주의의 주체로서 강의실 속 학생들을 오직 경쟁자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경쟁을 위해 스스로를 경주트랙 속 경주마로 만든다. 이처럼 자발적 착취가 미덕이 된 사회. 이에 본지에서는 성과주의 사회가 무엇이고 그것이 초래하는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은 없는지, 본교 몇몇 강사 및 교수들과 함께 고민해 봤다●

#1. “저기 지난주 수업에 못 나와서 그러는데 필기노트 좀 볼 수 있을까요?” 순간 강의실 내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필기노트를 가진 학생은 자신의 노트를 빌려달라는 학생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보낸다. “성적은 상대평가인데 제가 그쪽한테 노트 빌려드려서 제 성적 안 나오시면 책임지실 건가요?” 노트를 빌려달라던 학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 본교 중앙도서관 안. 토익 책을 비롯해 대기업 인적성 모의고사 문제집과 각종 자격증 관련 서적이 산을 이룬 채 책상 위에 쌓여 있다. 옆 책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로 삼은 채 그 속에 박혀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작은 발소리조차 ‘자신의 앞날을 방해하는 방해공작’으로 간주하며 그 소리에 싸늘한 눈초리로 응대한다.

오직 ‘경쟁’만이 존재하는 대학앞서 제시한 두 사례는 이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학생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성과를 내기 위해 밤낮이 없다. 자신의 성과를 물질적 형태(학점, 자격증)로 구현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문화인류학의 이해’를 강의하는 박충환 강사는 “현재 학생들은 자신이 어떠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순히 자신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이러한 경쟁 구도와 성과주의적인 세계관은 신자유주의 사회 시스템 속에서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박 강사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과 성과는 성실과 노력이라는 가치가 덧대어져 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며 “성실과 노력이라는 것은 분명 맞는 표현이지만 현재 사회구조에서 내가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내는 사회상은 다른 경쟁 상대를 밑바닥으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성실과 노력. 표면적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이는 이것을 추구하는 사회구조에 따라서는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다.

성과를 위해선 약물도 불사하는 대학생“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 간다. 성과를 위해서는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피로사회 p120-121)‘핫식스’나 ‘레드불’ 같은 일명 에너지드링크는 이러한 성과주의에 휩싸인 한국 사회를 기반으로 급성장했다. 지난 2010년 3월에 발을 들인 국내 에너지드링크 시장은 지난해까지 약 500%의 급성장을 이뤘다. 이러한 에너지드링크의 대중화 요인은 제각각이다. 밤새 일이나 공부를 하려고 마실 수도 있고, 지치지 않고 놀기 위해 마실 수도 있다. 하지만 에너지드링크가 성과주체들에게 주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성과주체의 ‘각성화’이다. 박건우(사회대 심리 13) 씨는 “시험기간에는 밤샘 공부를 위해 에너지드링크를 마신다”며 “하지만 평소에는 낮에 수업과 과제에 치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밤에는 에너지드링크를 마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화인류학의 이해’를 강의하는 이준원 강사는 “자신의 착취로 얻은 결과물을 다시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며 “내가 자신을 착취하면서 받은 피로를 다시 자신이 얻은 결과물로 치유 하는 구조는 결과적으로 이중착취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에너지드링크는 밤새 공부나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을 착취하는 도핑도구로 사용된다. 또한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밤새 노는 자신에게 또 다시 도핑도구로서 사용된다. 에너지드링크는 언제나 성과주체를 ‘각성’시킨다. 그리고 ‘각성’상태에서만 우리는 치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지난 20세기는 기계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산업화 사회였다. 동시에 미셸 푸코가 정의하는 규율사회였다. 규율사회는 병원, 감옥, 공장 등으로 이루어졌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규율의 공간 안에서 사회에 복종적인 주체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현대는 미셸 푸코가 말하는 규율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가 저문 자리에는 완전 새로운 사회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성과사회이다. 성과사회는 규율사회와 같이 사람들을 복종적인 주체하는 병원, 감옥, 공장과 같은 공간에 내몰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성과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 속에서 자신을 경영하게 됐다. 성과사회 속의 자신은 자유롭다. 아니, 자유롭다고 확신하는 삶을 가진다. 그러나 그로인해 끊임없이 성과를 착취하는 괴물이 되어간다. 이러한 성과주체가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성과사회가 약속하고 있는 황금빛 미래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성과주체는 그러한 황금빛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자기착취를 한다. 남재일 교수(사회대 신문방송)는 “성과사회는 꿈꾸는 삶을 실현하는 유일한 수단이 성과로 설정되는 스타일 속에 감금돼 있다”며 “시선은 언제나 더 세련된 스타일, 더 유능한 자신만으로 향한다”고 답했다. 이어 남 교수는 “현대 사회의 개인은 외부와의 소통이 철저히 단절된 나르시즘적 개인이다”며 “그는 동지도 적도, 주체도 타자도, 소통도 적대도 없는 자기 증식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긍정성의 과잉, ‘성과사회’의 질병규율사회에서 질병은 단지 바이러스적이거나 박테리아적인 질병에 불과했다. 이러한 질병들은 과학기술에 힘입어 어느 정도 치료가 가능했다. 이러한 치료법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의 이질성과 타자성에 의거하여 치료한다.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에 그 기초를 둔 것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에서 이러한 면역학적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성과의 과잉만이 존재할 뿐이다. 성과주체의 과잉은 부정성이 아닌 긍정성에 기초를 둔다. 그리고 그 면역학은 성과주체에 대한 과잉의 긍정성에 아무런 수단을 끼칠 수 없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학적인 저항으로 모습을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과다에 따른 거부반응으로 나타난다. 남 교수는 “(긍정성의 과잉에) 적대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 사회의 주체는 새로운 상황을 창조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능력에 대한 강박과 무능에 대한 자각으로 지친다”며 “모든 것이 열려 있는데 능력이 안 된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개인에게는 우울증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어 남 교수는 “우리사회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는 것도 한국의 분주한 성과주의 때문이다”고 답했다. 박충환 강사는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성과주체들의 우울 증상에 대해 해결점을 제시했다. 박 강사는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라는 질문 속에 파묻혀 왔다”며 “스펙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갖출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을지 등의 질문만을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박 강사는 “이제는 ‘왜?’라는 질문을 던져 볼 시기가 왔다”며 “왜 스펙을 갖추어 연봉을 더 많이 받아야하는지, 그러한 경쟁 구조 속에서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면서 그 해답들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방법밖에 없다”고 답했다.

“결국은 사회 구조의 문제다”성과주의 사회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이 재편성되는 과정 속에서 나온 문화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성과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먼저 살펴봐야 함이 옳다. 박 강사는 “현대 사회는 자본의 축척논리로 이루어졌기에 사람들이 그 논리와 구조를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며 “그렇기에 이를 단순히 경제적인 현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박 강사는 “많은 성과주체들은 경제 성장을 하고 일자리가 많아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구조가 심화될수록 사회의 성과주의는 더욱 만연해질 것이다”며 “결국 해결은 올바른 정치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남재일 교수 또한 “결국 어떤 전략을 통해 소수의 윤리, 정치적 개인을 그릇된 정치에 맞서는 정치적 주체로 정립하느냐가 관건이다”고 말했다.

이상지 기자/lsj12@knu.ac.kr정인혜 기자/jih13@knu.ac.kr참고: 『피로사회』(한병철 저), 나·들 창간호(p132-p137)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지난 2010년 독일에서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라는 책을 펴냈다. ‘피로사회’는 출간 즉시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독일 주요출판사에서 자신의 저서를 출판하여 이미 꾸준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이 ‘피로사회’는 그를 독일에서 저명한 철학자로서 자리매김 되는데 단단히 한몫 했다. 2년 뒤 한국에서도 그의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이제 독일에서는 ‘피로사회’라는 단어가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사용된다. 이제 한국에서도 ‘피로사회’라는 단어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수많은 칼럼과 글들이 ‘피로사회’라는 단어와 ‘긍정성의 과잉’등을 인용하며 현대사회의 병적 양상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성과사회의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주체이다. 자기 착취는 미셸푸코가 말하는 규율사회에서 적용하던 타자의 의한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부정성인 규율사회가 아닌 착취의 긍정을 기초한 것이 바로 현대의 피로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로사회 속에서 각 주체는 규율이 아닌 자유의 상태이다. 자유의 상태에서 착취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망가지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착취한다. 그렇게 망가진 주체는 우울증과 소진증후군 같은 정실질환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사회가 피로한 이유다.

이상지 기자/lsj12@knu.ac.kr참고: 『피로사회』(한병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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