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체는 말을 통해서 구성된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인간 주체가 가진 모든 정신적 근심, 고통, 불안들을 ‘언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가 명명하듯 “말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가 ‘상징계’라고 명명하는 ‘언어’의 구조 속에 불가피하게 위치하게 된다. 나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특정 태명으로 불리었고,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그 이름이 나를 대표하여 나를 의미하고 있다.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 대한 명칭들(예를 들어 누구의 딸/아들, 손녀/손자, 조카, 선생님/제자, 아버지/어머니, 삼촌/이모/고모 등)에서도 나는 나의 존재가 언어, 즉 기표로 규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라캉은 인간이 이처럼 기표로 규정됨으로 인해 그의 실재에서는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인간은 그가 특정 기표로 불리는 순간, 그의 실재와 그 기표는 분리된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기표로 말해진 것’은 기표이지, 해당 기표가 지칭하려고 했던 실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남경아’라는 기표는 분명 나를 대표하고 지칭하는 기표임에는 틀림없지만, ‘남경아’라는 기표 자체가 나의 실재는 아니다.)

2. 자아는 거울상의 나르시시즘을 통해서 구성된다.


한편, 인간은 또한 자기애(나르시시즘)의 구조 속에 위치한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자아’에 대한 사유는 본능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규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와 같이 자기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지만, 처음부터 자신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자아에 대한 개념은 정신작용의 부가를 통해 점진적으로 구성되어진 것이다. 프로이트나 라캉의 이론에 따르자면, 그것은 자아 밖의 세계, 곧 타자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라캉은 그의 ‘거울 단계 이론’에서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과정, 곧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의 구조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생후 6개월의 시기에 접어든 인간 유아는 생리학적으로는 여전히 미성숙하지만, 그에 비해 시력은 조숙하게 정교화 돼 있다. 유아는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껏 부분적으로만 확인했던 자신의 신체를 하나의 전체적인 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낯설지만 완전한 듯 보이는 전체적인 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자신의 모습이라고 동일시하는 상상을 통해서 유아가 지금껏 느껴왔던 무기력함이 보상되고, 불완전하게 인식되던 자아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오는 불안이 극복된다. 이와 같이 인간이 가진 자기애의 본능은 인간으로 하여금 유사자와 자신을 동일화하는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유아가 거울을 바라보는 바로 이 장면에서, 거울 속에 비쳐진 상으로서의 유아와 거울을 바라보는 자로서의 유아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명칭으로서의 특정 기표가 우리의 실재 자체가 아니었던 것처럼, 거울 속에 비친 상으로서의 유아는 거울을 바라보는 유아 자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대표하는 기표가 우리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거울 속에 보이는 우리의 상을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인간 주체가 기표나 이미지와 같은 ‘타자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들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사유작용들은 언제나 분열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그 분열을 동일화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상상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의 사유가 거치게 되는 상상화와 관련된 영역을 라캉은 ‘상상계’라고 명명한다.

3. 자아도 주체도 진정한 ‘나’는 아니다.
라캉에 의하면 ‘말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모든 의식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영역을 거칠 수밖에 없고,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인간이 사유하게 됐던 것은 결국 라캉이 말하는 ‘objet a(오브제 아)’이다. 인간의 의식은 언제나 ‘실재계’를 향하고 있지만, 인간 의식이 전적으로 언어라는 구조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한 사유가 향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실재가 아닌 objet a, 곧 허상이자 일종의 환상일 수밖에 없다. 우리를 지칭하는 기표 자체가 실제적인 우리가 아님에도 우리는 우리를 그 기표와 동일시한다.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가 실제적인 우리가 아님에도 우리는 그 상을 바라보는 우리와 거울 속의 이미지를 동일화하는 상상으로 그 둘 간의 분열을 외면한다. 우리는 동일시되지 않고 분열될 때의 불안, 곧 실재계를 경험할 수 없는 무력함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서, 기표, 이미지와 같은 상징계와 우리를 동일화하는 상상계에 의존하는 구조 속에 위치한다. 라캉은 인간의 모든 병리적 정신현상들이 인간이 타자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는 그와 같은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스스로가 가진 자기애적 본능이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에 대한 사유를 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사유는 타자적인 것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주체의 구조는 이미 소외를 예고하는 분열의 구조이다.
그렇다면 ‘언어’라는 타자와 의식 사이에 발생하는 분열로 인해 인간이 겪는 정신적 불안과 고통을 라캉은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을까? 표면상으로는 아이러니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라캉의 정신분석치료는 상담에 의존한다. ‘언어’가 가진 불완전성은 불충분성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언제나 다의적이다. ‘언어’는 화자에 의해 그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에 의해 그 뜻이 해석되는 구조이다. 언어가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언어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의식 과정이 겪는 분열의 과정이 어느 한 지점에 고착되어 있을 때 그것을 벗어날 길을 제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실재를 언어와 상상적으로 동일화시킬 때에만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그가 양자 사이의 분열을 겪고 있다면, 그것의 극복 방안은 양자를 다시 동일화시키는 방법뿐이다. 다시 말해서, ‘남경아’라는 기표가 실제의 내가 아님에 집착하지 않고, 거울 속 이미지가 실제의 내가 아니라는 불안에 고착하지 않고, 그 기표와 이미지를 기꺼이 나로써 상상하는 방법뿐이다.
 
4. 정신분석학의 방법과 목표: 무의식의 주체 표상과 환상의 변증법
라캉의 정신분석 상담은 어느 한 지점에 고착된 사유를 변증법적 욕망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상담은 물론 상징계의 논리인 ‘말’에 의존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담과는 달리 정신분석의 상담은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정신분석의 분석가는 ‘분석주체’의 ‘의도된 말’에는 흥미를 갖지 않는다. 분석가는 ‘분석주체’가 사전에 준비한, ‘의도한 말’이 아닌 전혀 다른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럼으로써 분석가는 ‘분석주체’가 의도하지 않은 차원을 분석주체 스스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석가의 말들은 의도성과 무의식성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분석가가 선생님의 자리에 서서 훈계적인 말을 제공하면, 상담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차라리 반대로 내담자가 분석가를 자신의 상담 손님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더 이상 분석가에서 들을 말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분석가를 비판하고 그를 부정할 때, 상담은 종지부에 온 것이다.
부정과 거부는 주체가 홀로서기에 성공한 징표이다. 이처럼 정신분석의 상담은 철저히 주체 스스로가 의식적인 주체로 다시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상징계에 의해 주체가 다시 출현할 수 있도록, 주체의 회복을 분석가가 돕는 과정이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주체는 물론 ‘의식적인 주체’다. 그것은 상징계의 논리에 따라 의식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근대적 주체’가 말하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로부터 확실성을 구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징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objet a라는 특별한 매개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주체다. 즉 스스로 언어라는 타자가 되어 그의 존재를 이런 기표로 혹은 저런 기표로 상상하며 끊임없이 자아를 형성해 나갈 때, 그는 약간의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주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말(기표)이 의미(실재)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말(기표)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나의 기표가 그를 고착시키려고 하면 그는 그것이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기표임을 직시하고 다른 기표로 그 스스로 이동할 때, 그는 분열과 동시에 약간의 자유를 가진다. 
자기애적 구조 안에 위치하며 자아를 지속적으로 구성해 가야 하는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사유를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사유를 포기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의미’를 포기할 수는 있다. 우리에게 완전성은 실현불가능한 일종의 환상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언제나 실재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고 완전성을 빗나가는 일종의 환상만을 우리에게 제공할지라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주체는 실재와 환상이라는 분리 사이에서 분열의 극으로 치닫지 않고, 끊임없이 상상적 사유의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욕동’의 주체로 거듭난 주체이다. 그는 비록 언어라는 구조 속에서 실재를 완전히 경험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사유를 계속할 수 있는 주체이다. 정신분석을 통해서 새로이 탄생한 주체, 즉 환상을 통과한 주체는 여전히 상징계의 구조 속에 속박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다의성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주체이다.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으면, 그는 이미 자기의 환상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환상의 사로잡힐 뿐이다.

남경아(인문대 철학과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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