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19일, 경북대 시계탑 앞에는 구름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무런 무대 장치 없이 마련된 판에는 적갈색 탈을 쓰고 학생복을 입은 청년과, 반쪽수염의 백색탈을 쓰고 헐렁하고 낡은 양복을 걸친 교수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과연 무슨일이 있었던 것 일까?● 

(반쪽수염의 백색탈을 쓴 교수가 관객들의 모습을 희화화 시키며 재담을 하다가 일구를 만난다. 일구는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듯이 오늘이 제 생일이라고 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교수는 관객들에게 오늘이 무슨날이냐고 물어본다) 

교수: (구경꾼에게 다가서서) 여보시오, 볼일없는 사람들아! 일신 우일신 일일신 하니 유신의 날인가? 월급 적게 주고 수출증대하니 근로자의 날인가? (구경꾼들이 ‘사일구’라고 외친다.)

일구 : 그 사람 용타! (구경꾼을 향해) 오랜만에 바른말 한번 하는구나. (교수를 보며) 하, 선생님, 제가 나기는 일천구백육십년 사월 열 아흐렛날 났습니다요. 그래서 제 이름이 바로 사일구가 아닙니까?

교수 : 하, 그말 들어보니 그도 그럴 듯 하구나. 그래 네 생일은 해마다 이리 거창한 모양인데 어찌 20년이 지나도록 내겐 소식이 없었느냐? 하이얀 집에서 새끼만 쳤느냐? 서신검열이 있었느냐?

일구 : 그간 집안이 살벌해서 생일잔치 한번 변변히 하지 못했습니다.

교수 : 살벌했다니?

일구: 위수령이다. 긴급조치다, 계엄령이다 해서 꽁꽁 묶여 있다보니 어찌 살벌하지 않았겠소. 어디 그뿐입니까? (발을 구르며) 저 위에서 콰앙콰앙 내리 누르는데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구와 교수는 어딘가에서 푹푹 썩는냄새가 난다고 하며 이 냄새귀신을 없애기위해 관객들과 다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래도 냄새가 사라지지 않자 교수와 일구는 냄새 없애는 굿을 하기로 한다. 무당을 부르는데 일구의 엄마인 무당은 일구를 애타게 찾고 있다.)

무당 : …우리 일구가 어떻게 해서 나온 아인데, 경상도피, 전라도피, 충청도피, 강원도피, 아이피, 학생피, 어른피, 여자피, 남자피 할 것 없이 이 한반도 모든 피들이 점지해준 아인데, 그만 낚아채 가고 말았구나! 서러워라, 아이고 서러워라! (덧배기 장단에 맞추어 무당이 춤을 춘다.)

극본 김사열, 경북대학교 민속문화연구회 공동창작 <냄새굿놀이> 中

경북대 냄새굿놀이, 민족극의 시작을 알리다 

이는 1980년 4월 19일 경북대 민속문화연구회(이하 탈춤반)가 경북대 시계탑 앞에서 4.19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공연한 <냄새굿놀이> 대본의 일부이다. <냄새굿놀이>는 사일구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일구의 엄마가 일구를 찾는 내용이다. 제목이 <냄새굿놀이>인 것은 4.19를 억압하고 자유를 해치는 세력인 ‘썩은 냄새’를 없애기 위해 굿을 하기 때문이다. 연극을 시작하기 전 탈춤반은 먼저 길놀이(탈춤 또는 탈놀이공연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집합지에서부터 공연장소까지 행진하는 것)를 하면서 시계탑까지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500~600명의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까지도 와서 냄새굿놀이를 구경했다고 하니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컸을 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냄새굿놀이> 연출을 맡았던 김사열 교수(자연대 생명공학)는 “지금 학생들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그때는 사회가 많이 억압된 상황이었다. 말 한번 잘못해서 붙잡혀 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공연이 진행됐으니 관심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며 “당시에는 4.19를 기념하는 걸 금기시 했는데 우리는 그걸 문제라고 봤다. 그래서 주인공 이름을 일구라고 설정을 하고 일구의 엄마가 잃어버린 일구를 찾는 내용으로 정했다. 이는 군사정권이 군림하던 암흑기에 맞서 4.19혁명이 일어났던 정신을 이어받아 4.19를 되찾는다는 의미였다”고 회고했다. 

비록 공연된 기간은 짧았지만 <냄새굿놀이>의 극 양식은 후에 「놀이패 탈」등으로 이어지며 대구 지역 민족극의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현실을 고발하고 다양한 삶의 단면을 비춰낸 민족극

흔히 민족극이라 하면 탈춤이나 판소리 등의 전통극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기쉽다. 그러나 민족극의 정의는 ‘분단이라는 민족 현실을 극복하려는 적극적 예술이념에 기초하여, 민족현실을 민중적 입장에서 형상화해내는 연극예술’ 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 지역 민족극 공연된 민족극의 양상을 보면 극단「시인」에서 거창의 양민 학살 사건을 극화해낸 <이땅은 니캉 내캉> 이나, 일제치하에서 교원노동조합운동에 이르기까지 주체적이지 못했던 교육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비판하는 <전천후 선생님>같은 공연이 있었고, 극단 「떼·풀이」와 같이 <신문 1,2,3> 연작을 내어 놓으면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매매춘 현상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을 본격화 한 것도 있었다. 

연출가 최재우 씨는 “민족극의 형태는 마당극의 형식인 경우가 많은데, 마당극은 특별한 조건 없이도 그 장소에 있다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민족극의 본질적인 가치는 서민들에게 열려있는 극이라는 데 있다” 며 “마당극이 마초적이고 가벼운 극이라 생각하는데 개인의 문제의식이나, 시사문제, 민족문제등 진중함을 가진 극이다” 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꼭 이런 시사문제나 민족문제를 다룬 극 만이 민족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재석 교수(경북대 국어국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야기가 가문이라는 굴레가 개인을 억압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현실을 담아냈듯이, 개인의 사랑이야기라도 그 안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다면 민족극이 될 수 있다” 며 “결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주 관심사를 연극이라는 생생한 언어로 풀어냈다면 민족극의 범주에 들 수 있다”고 이야기 했다.  

무대극과 마당극이 상호 보완적 관계를 가진 대구지역 민족극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대구 지역 민족극의 특징은 바로 극 양식의 다채로움에 있다. 민족극에서 규정된 공연 양식은 없다. 민족극은 전통적인 가면극에 기초한 마당극과 서구적 서사원리에 입각한 무대극을 자유롭게 선택해 왔던 것이다. 대구 지역 민족극의 경우 초창기「놀이패 탈」의 원형 무대와 객석 배치, 극단「시인」의 극중 인물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등의 방식은 전통 탈춤식의 진행 방식을 차용해 마당극적인 특성을 지녔다. 반면「떼·풀이」나 「한사랑」같은 극단에서는 무대극을 중심으로 에피소드의 제시를 통해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기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대구 지역 민족극은 마당극 형식과 무대극 형식이 공존함으로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었다.

자문: 김사열 교수(자연대 생명공학)

김재석 교수(인문대 국어국문)

최재우(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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