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착한남자’, 소설이 원작인 ‘해를 품은 달’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 극을 전개시키는 요소로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재가 바로 ‘기억상실’이다. 기억상실은 극의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관객의 애절함, 스토리의 긴박함을 살리는데 아주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기억상실이라도 기억을 잃은 양상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해를 품은 달’의 연우는 과거를 몽땅 잊어버리고 ‘시크릿가든’의 주원은 과거의 기억 중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기억만 잊어버린다. 또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인 레너드는 과거의 기억은 있지만 현재의 기억은 10분만 지나면 잊어버린다. 기억상실은 왜 이렇게 다양한 양상으로 발현하는 것일까?●

 

인간이 ‘기억을 한다’는 것은 정보를 받아들여 뇌 속에 입력하고 저장한 뒤 다시 밖으로 꺼내 출력할 수 있을 때를 말한다. 따라서 기억상실은 이러한 기억의 과정, 즉 입력과 저장 그리고 출력 중 한 가지 이상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나타나게 된다. 어떤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느냐에 따라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현재의 기억을 오래 지속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기억상실은 종류를 막론하고 발생하는 원인이 매우 다양하다. 흔히 알고 있듯이 뇌에 물리적 충격이 가해지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원인일 것이다.

역행성 기억상실: 과거의 나는 누구?

‘착한남자’에서 서은기(문채원 분)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자신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물을 기억하지 못한다. 교통사고로 인해 사고 이전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가 바로 ‘역행성 기억상실’이다. 역행성 기억상실은 뇌에 외상이나 스트레스 등 의식사건이 일어나기 전 일정 기간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증세를 말한다. 실제 역행성 기억상실이 일어나면 기억을 잃어버리는 구간은 일정 시간이나 몇 주일 혹은 몇 달 등 일정 기간 정도로만 발생한다. 따라서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간의 기억을 해부학적 의미에서 본다면 여러 감각 기관을 통해 뇌로 들어온 정보들은 정보를 인지하는 ‘1차 영역’을 거쳐 ‘연합영역’에 이르러야 저장된다. 우리들이 출력해내는 과거의 기억들은 대부분 이 연합영역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역행성 기억상실은 이러한 연합영역에 문제가 생겨 발생한다. 외부의 충격이나 뇌의 질환 등으로 연합영역이 망가지면 연합영역 중 망가진 부분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세포학적으로 본다면 기억은 뇌의 뉴런과 뉴런의 신경을 이어주는 시냅스의 자극에 의해 저장되는데, 외부의 충격에 의해 어떤 시냅스가 손상돼 그 부분의 기억이 손실된다.

해리성 기억상실: 충격적인 사건을 잊다
‘시크릿가든’의 김주원(현빈 분)은 어렸을 때 홀로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경험을 한다. 이 경험은 주원의 정신에 가장 무서운 기억이 되며, 이후 정신을 차린 주원은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오직 이 기억으로 인한 이유 모를 공포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해리성 기억상실’이다.
해리성 기억상실은 역행성 기억상실의 한 종류이다. 이는 굉장히 끔찍하고 무서웠던 기억에서 정신을 지키기 위해 작용하는 심리적 방어기제 ‘억압’에 의해 발생한다. 어릴 때 당한 성폭행이나 살인 등의 스트레스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해당 기억을 출력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현대 과학으로도 아직 방어기제가 뇌의 어느 부분에서 이뤄지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어기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작용하는 심리적 요소이기 때문에 해당 기억에 대한 최면, 지속적인 상담 등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해리성 기억상실을 치료할 수 있다.

전향성 기억상실: 기억을 간직할 수 없는 슬픔

영화 ‘첫키스만 50번째’의 주인공인 헨리(마담 샌들러 분)는 루시(드류 베리모어 분)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데이트를 한 뒤 다음날 헨리는 루시를 반갑게 인사하지만 루시는 헨리를 처음 보는 것처럼 행동한다. 바로 ‘전향성 기억상실’의 전형적인 예이다. 전향성 기억상실은 뇌에 외상이나 스트레스 등 의식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새롭게 받아들이는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기억은 전전두엽에서 관장하는 단기기억을 거쳐 측두엽 해마에서 관장하는 장기기억으로 넘어가 저장돼야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다. 전향성 기억상실의 경우는 측두엽의 해마가 손상을 입은 경우다. 따라서 단기기억이 활성화되는 아주 짧은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은 정보를 기억할 수 있지만 한 시간이나 하루 등 더 긴 시간 동안 습득된 정보를 기억할 순 없게 된다.

자문: 이정재 임상교수 (칠곡경북대학교병원 정신건강센터장)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