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이제는 점점 그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어져 가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추억의 가게를 찾아 그 가게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들어봤다


우정사에서 만난 시간여행자의 흔적, 우표

대구 최고(最古)의 우표사, 우정사는 1983년에 건들바위 네거리에 처음으로 자리 잡았다. 우정사의 사장 조명환(58) 씨는 “대구에 20여 곳이 넘는 우표 가게가 있었지만, 현재는 5군데 정도만 남아있다”며 “과거에 비해 우표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우표 수집의 전성기를 추억하다
옛날에는 우체국에서 새 우표가 발행되는 날에는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우표의 인기는 초등학생의 대다수가 취미로 우표 수집을 적을 정도였다. 조 씨는 “1980년대에 통행금지가 있었는데 그 당시 대통령 우표가 발행되는 날이면 사람들이 밤에도 우표를 사러 갔다”며 “경찰이 우표 사러 간다고 하면 봐주곤 했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우표는 범국민적인 관심사였다. 하지만 현재 우정사의 고객은 주로 40-50대로, 학생들이 우표를 수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특히 우표의 통신 판매가 시행되면서 예약제로 판매되어 줄을 설 필요가 없어졌다. 그 뒤로 점차 우표의 인기가 떨어졌다. 때문에 우정사도 옛날돈이나 승찰권, 입장권, 골동품으로 수집품을 넓혀가며 가게를 유지하고 있다.

우표 가격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1960-70년대는 서민들이 살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때문에 저가인 우표는 친구들과 공감대도 형성하고, 펜팔을 통해 각국의 사람들과 소식을 교환하기도 하는 좋은 소통의 도구였다. 당시는 우표 전시회도 자주 열려, 우표 수집이 붐이었다. 조 씨는 “요즘 젊은이들 중에 우표 가격을 아는 친구가 몇 이나 되겠냐”며 우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우정사에선 종종 팔지 못한 우표를 편지 부치는데 이용하기도 한다. 옛날 우표도 화폐 단위가 바뀌지 않으면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30원 짜리 우표를 이용하고 싶으면 요즘 우표값인 270원에 맞춰 편지봉투에 9장을 붙이면 어디든지 편지가 전달된다.

우표를 보면 역사를 알 수 있다  
국경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여전히 기념 우표가 발행된다. 조 씨는 “우표를 보면 역사가 보인다”며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를 보여 주었다. 1884년에 발행된 최초의 우표는 5, 10, 25, 50, 100문(당시 화폐 단위) 5가지로 일본에서 발행되었으나, 5, 10문만 사용됐다. 나머지는 우정국 개국까지 도착하지 못해 이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도 우표를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대통령 우표 중에는 5원짜리 1대 대통령 이승만 우표는 희소성 때문에 현재는 60만원에 거래 될 정도로 가치가 높다. 조 씨는 “우표에 관심이 생겼다면 다음달 1일에 발행되는 숭례문 복구 준공 기념우표를 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면서 올해 우표발행계획표를 건넸다.



 

아버지들의 아지트 ‘이용소’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이용소는 말끔한 셔츠를 입고 머리를 깎아주던 아저씨와 수동식 바리캉(이발기)에 머리 뜯기던 아픈 기억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지금은 미장원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여전히 중장년층은 이용소를 이용하고 있다. 대구에서 46년째 이용소를 운영하고 있는 문동식(73) 이용사에게 이용소의 추억과 현재에 대해 들었다.

머리부터 면도까지 정성스럽게
이용소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시설을 갖추고 주로 남자의 머리털을 깎아 다듬어 주는 곳’이다. 이용소를 찾는 대부분의 손님은 남성 중장년층이다. 문 이용사는 “예전에는 주로 공무원이나 회사원들이 많이 찾았다”며 “당시 이발 한 번에 2백원을 받았는데 당시 2백원이면 짜장면 한 그릇에 영화까지 볼 수 있을 만한 돈”이라고 말했다. “이용소의 이발은 미용실과 달리 일일이 손으로 커트하고 면도까지 해주는 서비스”라고 말했다.

신입사원이 노인이 되어 찾는 곳
한번 이전을 한 뒤 30년이 넘게 한 곳을 지킨 문 선생님의 이용소는 몇 십년지기 단골손님이 많다. “지금은 주로 노인 분들이 많이 오시는데, 예전에 직장생활하시면서 이용하던 손님이 퇴직한 이후에도 멀리서 찾아온다”며 “그 분들은 머리를 깎는 것과 더불어 예전의 추억과 사람을 보러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용소를 찾는 사람도 많이 줄었다. “대구 인구가 줄어서 그런지 장사가 잘 안된다”며 “예전에는 종업원만 5명이 넘게 고용했는데 지금은 아내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라지는 이용소, 아쉬운 발걸음
현재 문 선생님을 이어서 이용소를 운영할 후계자는 없는 상태이다. “예전에 대구에 이용소가 많았는데 이제는 다 없어지고 있다”며 “내 나이 또래는 다 유명을 달리해 마음이 쓸쓸하고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발을 하겠다는 그는 자신의 이용소에 대해 “난 여기만 나오면 즐겁고 시간이 너무 잘가서 좋다”며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계절을 알 수 있는 가게, 얼음집과 연탄집


북적북적한 서문시장 골목길 한편에 몇 십장의 연탄이 쌓여있고 간판도 없는 가게가 있다. 바로 30여 년 동안 연탄과 얼음을 팔아 오신 김 할머니(71)의 가게다. 얼음집과 연탄집은 여름과 겨울을 대표하던 가게였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라지는 대표적인 가게로 꼽힌다. 김 할머니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취급하고 계셨다. 김 할머니는 “시아버지가 하던 가게를 물려 받아 시작했다”며 “연탄 1장에 20원하고 얼음 한 봉지에 50원하던 시절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겨울엔 연탄, 여름엔 얼음을 팔고 있어. 시장에서 커피 파는 사람들 한테 뜨거운 물을 제공하는 것도 우리 가게가 하는 일이지”라고 말했다. 당시 겨울이면 집에 연탄 들이는 것이 일상적인 연례 행사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김 할머니는 “그땐 하루에 2백장은 너끈히 팔았었지. 그렇게 연탄이랑 얼음 팔아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다 보냈지”라고 말하며 활짝 웃으셨다.


냉장고와 보일러에 쫓겨난 연탄과 얼음
냉장고와 기름, 가스등 다양한 연료 보일러의 보급은 김 할머니에게 피부로 와 닿는 문제다. “요즘은 사는 게 힘들어. 날씨가 추우면 연탄이 나가야 하는데 안 나가. 하루에 한 5장 정도 파는데 딱 나 혼자 밥 먹는데 쓸 돈밖에 안 나오는 거야” 현재 연탄 1장은 5백원 수준이고 1장을 팔면 남는 돈은 고작 1백원 남짓한 수준이다. “요즘에 누가 연탄을 써. 전부 가스, 기름, 전기쓰지. 얼음은 예전에 끝났어. 옛날부터 집집마다 냉장고가 생기면서 가정집 손님은 다 없어졌고 가게에서도 쓰는 양을 많이 줄였어”라고 말했다.

“내가 죽으면, 누가 이걸 하겠노”
김 할머니와 더불어 서문시장에서 연탄집을 하던 분이 돌아가신 이후 할머니 가게는 서문시장에 홀로 남은 연탄집이 됐다.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배달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힘들어서 그런 것도 못하지” 다른 곳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요즘들어 연탄의 수요는 늘었지만 그 수요는 도매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동네 연탄 가게는 사라지는 추세다. “내 죽으면 이것도 이제 끝이지 아무도 이거 할 사람 없다”는 할머니의 말에서 깊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래도 가끔 찾아주는 손님이 고맙지. 그래서 계속하는 거지” 손님이 찾아오자 반갑게 마중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왠지 모를 아쉬움이 묻어났다.


사진: 옥동진 기자/odj12@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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