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동 수제화 골목에서 55년 째 수제화를 만들어 온 조돌암(69) 씨를 만나봤다. 조 씨가 제조 기술을 배울 당시는 1950-60년대로 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우리나라 경제가 무척 어려웠던 때다. 조 씨는 “무조건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제화 만드는 길로 입문하게 됐다”고 말했다. 조 씨는 지금은 자가 없어도 99% 정확하게 제도를 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이런 것이 바로 생활의 달인인 것이다.

향촌동 수제화 거리가 있기까지
1960-80년대까지는 향촌동의 길건너 화진동에 분홍신, 칠성, 캉가루 등의 가게가 있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금강, 에스콰이어 등의 메이커가 등장한 후 다 사라졌다. 지금 향촌동 수제화 골목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1980년대부터 일했던 사람이다. 그 이후에 들어온 인력은 없다. 조 씨는 “다들 학력이 높아져서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다”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최소 경력이 30년은 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조 씨는 “견습공 시절에는 일을 가르쳐 준다는 이유로 월급도 없었다”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에는 한 선생의 밑에 4, 5명의 중견습, 하견습생들이 수련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장을 하면 선생은 제자들을 변두리의 양화점으로 소개해 준다. 변두리 양화점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인정을 받으면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자신의 가게를 차린다.


수제화 수련공의 스승은 ‘세월’
요즘은 작업과정이 기계화되고 분업화되어 수제화 한 켤레를 만드는 시간이 많이 단축됐다. 과거에는 한 켤레를 만드는 데 20시간 이상이 걸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장인도 하루에 2켤레 이상을 만들 수 없었다. 수제화는 만드는 것부터 광을 내는 것까지 사람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반면 지금은 부품이 부위마다 존재해서 가져와서 조립만 하면 된다.
한번은 조 씨의 가게에 포항에서 한 여대생이 찾아 온 적이 있다고 했다. 조 씨는 “그 여대생은 이탈리아로 신발을 공부하러 가기 전 직접 제작 과정을 보고 가려고 찾아 왔더라”며 “하루 정도 구경을 하고 돌아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발 만드는 것은 단기간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 십년은 꾸준히 작업과 수련을 거쳐야 가능하다. 때문에 수제화 기능공의 스승은 오랜 세월일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발
수제화는 그 사람의 발 형태에 따라 만드는 반면, 기성화는 고정된 형태에 마구 찍어낸다. 조 씨는 “요즘 사람들은 신을 고를 때 신의 외견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며 “하지만 발도 사람의 얼굴처럼 제각각이어서 자기 발에 잘 맞는 신을 신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떤 때는 손님의 발이 짝짝이여서 구두의 양쪽 굽의 높이를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조 씨는 “이 나이까지 일을 하다보면 발만 봐도 건강을 안다”며 “새끼 발가락이 들려있는 사람은 치매가 잘 오고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발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는 조 씨의 말에서 장인의 풍모가 보였다.


           

사진: 옥동진 기자/odj12@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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