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모든 예술의 궁극적 원리이며 모든 예술이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다”
세계 문학의 거장인 괴테가 남긴 명언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예술가들 중에는 오직 예술과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사람이 많다. 수많은 정신 가치들 중에서도 ‘미’적 가치를 가장 우선시하며 이를 숭상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탐미주의자다. 우리에게는 언뜻 너무 괴기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들에겐 숭고한 가치의 실현이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그대, 탐미주의. 미를 향한 예술가들에게는 순수한 열망인 탐미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살인과 방화, 시체훼손을 해야만 천재적인 작곡을 할 수 있는 작곡가, 혹은 지상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스물다섯명의 여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향기를 뺏은 조향가. 과연 여러분들은 이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해한다면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최고의 아름다움과 예술을 위해, 더 나아가 인간 존엄성에 앞서 비록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일일지라도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사조, 바로 탐미주의다.
탐미주의라는 단어인 ‘Aestheticism’은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탐미주의의 사조가 영국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탐미주의는 1835년에 간행된 프랑스의 작가 ‘테오필 고티에’가 쓴 소설 『마드모아젤 모팽 양』의 서문에 적힌 한 문장에서 시작한다. ‘I'art pour I'art’. 불어로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뜻이다. 예술의 목적은 오직 예술의 미학이라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낭만주의의 사조가 유행했다. 이 때의 예술은 미적 추구라는 가치 이전에 사회와 독자에게 봉사하는 윤리적인 가치가 앞섰다. 이런 사조에서 오로지 미적인 가치가 목표가 되는 예술로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외친, 일종의 예술의 독립선언이 탐미주의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악덕은 예술의 재료일 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아름다움의 가면을 쓰고 추악한 짓을 저지르는 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매우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화가가 그려준 초상화를 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도리언 그레이는 자기 대신 초상화가 늙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도리언 그레이는 약혼녀에게 관심이 사라졌다는 말로 상처를 주게된다. 그날, 약혼녀는 자살한다. 집에 돌아온 그는 초상화가 어딘지 모르게 비열하게 변해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나쁜 짓을 저지를 때마다 초상화 속의 모습이 대신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도리언 그레이는 끝없는 타락 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가 나쁜 짓을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초상화 속의 도리언 그레이는 점점 더 늙고 추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는 그의 ‘영혼’ 혹은 ‘도덕성’을 대표한다. 그러나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외적인 모습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초상화, 즉 자신의 ‘영혼’이 그대로 늙고 추해지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누군가 자신의 추한 초상화를 보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걱정을 하게 되고, 결국 도리언 그레이는 초상화에 칼을 꽂는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덕과 예술을 철저히 별개로 나누고,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을 폭로하고 예술가를 숨기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며 예술가에게 악덕과 미덕은 예술을 위한 재료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주장을 대변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그의 탐미주의적 경향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1981년 영국에서 처음 이 작품이 나왔을 때 도리언 그레이의 방탕한 이중생활이나 살인 등과 같은 부도덕한 내용은 청교도들과 도덕주의자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는 이러한 비난을 예상하듯 책의 서문에서 “미덕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악덕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표현하며 정면으로 맞섰다.
도리언 그레이는 끝까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했다. 그것이 도덕적이든 아니든 도리언 그레이는 가장 충실하게 ‘탐미’를 실행한 인간상으로 볼 수 있겠다.

『광염소나타』: 불합리한 쾌락의 예술  

『광염소나타』의 ‘백성수’는 범죄행위를 통해서만 예술적 영감을 얻는 ‘천재’ 피아니스트다. 그는 원한 때문에 어떤 집에 불을 지르고, 그 불을 보고 영감을 얻어 ‘광염소나타’를 작곡하게 된다. 백성수는 그의 행동을 찬양하고 옹호하는 음악비평가 K씨의 태도를 보고 더 이상 음악적 감흥이 일어나지 않음에 괴로워하다, 들판에 불을 지르고 그날 또 하나의 걸작을 작곡한다. 백성수는 그 이후로 불을 지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체 모욕, 시간 그리고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에리히 프롬은 쾌락의 본질을 ‘고통스러운 긴장으로부터의 해방’에 수반되는 감정이라 정의한다. 욕망이 자기의 육체적 욕망에서 기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불합리한 정신적 욕구에 의해 욕망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질투심이나 소유욕, 새디즘적인 욕망 등은 불합리한 욕망에 해당된다. 이러한 욕망은 충족되더라도 순간적인 진정에 불과할 뿐, 병적인 작용을 일으킨다. 프롬은 이와 같이 불합리한 욕망의 충돌에서 생기는 쾌락을 ‘불합리한 쾌락’이라고 명명했다.
백성수의 이상행동은 바로 이런 불합리한 쾌락을 추구하는 불합리한 욕망에서 기인한다. 백성수에게는 예술 창조의 충동이 무의식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가 없다. 그가 보다 훌륭한 예술작품을 산출하기 위한, 또 더욱 강렬한 만족을 추구하기 위한 그의 파괴 행위는 증대된다.
“몇 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천 년에 한 번, 만 년에 한 번 날지 못 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린다 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 적어도 우리 예술가에게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비평가 K씨의 말이기도 하지만 김동인의 탐미주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아무리 끔찍한 범죄라도 미를 위해서라면 허용될 수 있는가’라는 김동인의 문제의식은 백성수의 행로와 내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재를 옹호하는 음악 비평가를 통해 주장되는 것이다. 김동인은 창작초기에는 춘원 이광수와 흡사한 사회 계몽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작품세계는 춘원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했고, 선의식을 택한 춘원과 반대로 김동인은 미의식을 택했다. 선악을 초월한 ‘미’라는 절대적 가치의 추구는 도덕과 관계없이 모든 광포한 행동을 가능케 했다. 결국 그는 퇴폐와 방탕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실천하는 향락주의에 탐닉하게 되었다.

『거꾸로』: 물질적 사치는 사치가 아니다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는 귀족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주인공 ‘데 제쎙트’가 세상에 대한 혐오를 느껴 은둔의 욕망을 품는다. 그러고는 타인의 취향에 대해 무조건적인 혐오를 갖고 주류 예술에 역겨움을 느끼면서 예술 작품은 물론 사소한 집기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독특한 미학적 기준을 들이댄다. 그 뒤 데 제쎙트는 1년간 자신이 직접 꾸민 인공 낙원에서 칩거를 시도하다 실패하자 사회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소설 『거꾸로』의 데 제쎙트는 ‘보들레르’가 주창한 탐미주의의 성격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인물이다. 즉 인생의 모든 것을 예술과 미적 추구에 바치는 데 제쎙트에게 있어서 자신의 막대한 부는 단지 아름다움을 숭상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데 제쎙트는 광택이 나는 자신의 양탄자에 움직이는 무언가를 놓기 위해 거북을 구입한다. 그러나 거북의 거무튀튀한 등껍질이 도리어 양탄자를 더럽게 만드는 것처럼 느끼자 거북의 등껍질에 금을 덧씌운다. 그럼에도 미적인 효과를 만족하지 못한 데 제쎙트는 거북의 등껍질에 값비싼 보석을 끼우기까지 한다. 타인이 보기에는 정말 쓸데없는 곳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은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단지 하나의 훌륭한 미적 완성을 위한 투자일 뿐이다.
보들레르는 인간의 모든 감각은 결국 한 가지에서 출발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각기 서로에게 호응하며 다시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다고 봤다. 이런 ‘상응의 원리’가 이뤄져야지 만이 진정한 미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 데 제쎙트는 자신의 술통을 미각오르간이라 하며 각각의 통에 플루트, 호른 등의 악기 이름을 명명한다. 이 통들에서 꺼낸 술을 섞어 마시면 각각의 악기들이 다 같이 합주를 하며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 교향곡처럼 목구멍에서 귀로 음악을 흘려 넣는 공감각의 황홀경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데 제쎙트의 물질적 사치는 사치가 아니다. 적어도 탐미주의적 관점에서는 말이다. 데 제쎙트와 같은 탐미주의자들은 이러한 정신적 사치를 향유하기 위해 자신의 삶과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자문: 김성택 교수(인문대 불어불문)
참고문헌 : 「김동인의 유미주의 연구」 (김혜정),

               「오스카 와일드 작품에 나타난 미학과 가면」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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