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하, ‘노무현’)을 떠올리면 그리스신화의 ‘시시포스’가 떠오른다. 제우스신의 노여움으로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올려야 하는 ‘천형’(天刑)을 받은 사나이-노무현은 굴려올린 바위가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렸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굴리는 그에게 정치권과 언론은 물론, 다수의 국민들도 신랄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우직한 그를 ‘바보’라 불렀고, ‘바보 대통령’은 그의 애칭이 되었다. 

제우스가 그에게 내린 벌을 ‘천형’이라 부르는 이유는 아마도 바위가 굴러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또다시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야 하는 일이 시시포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 속의 시시포스는 꾀가 많았다. 그러나 노무현은 시시포스처럼 꾀가 많지도, 또 약삭빠르지도 못했다. 죽음의 신 하데스마저 속인 시시포스는 장수를 누렸지만 노무현은 고향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지고 만다. 

죽기 전 남긴 짧막한 유서에서 노무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슬퍼하지 마라’고 했지만 우리는 슬펐고, ‘미안해하지 마라’고 했지만 우리는 미안했다. ‘원망하지 마라’고 했지만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왜곡하는 그들을 원망했다. ‘운명’이라고 했지만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죽음이, 우리의 현실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2009년 5월 23일-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다. 이 날 그는 평생 등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바위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제 수천, 수만 아니 수천만명의 국민들이 시시포스가 되어 언덕 위로 바위를 굴리고 있다. 질 줄 알고도 싸우는 싸움은 이긴다. 한 명의 시시포스는 언덕 위 바위를 떠받칠 수 없지만 수천만 명의 시시포스는 그 바위를 떠받치고 지탱할 수 있다. 노무현의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수개월이 지난 지금, 이제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대선정국도 이미 시작되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노무현을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참여정부 5년을 ‘실패한 5년’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이미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는 많은 평가가 있었다. 이 칼럼이 기존의 평가 수준을 뛰어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가,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 뿐만 아니라, ‘변호사, 인권운동가’, 그리고 ‘시민, 사람’으로서의 노무현에 대해서도 평가함으로써 현실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시시포스와도 같은 ‘노무현 정신’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Ⅰ. 정치가의 길, 대통령의 길

노무현은 투사형 정치인이다

정치가로서, 또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노무현은 투사(싸움꾼)’라고 할 수 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도 군인통치에 맞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확립시키기 위해 부단히 싸워온 ‘투사’였다. 그러나 전직 두 대통령의 경우에는 오랜 세월 국민들과 호흡을 같이하였고, 뇌리에 각인된 고정된 이미지가 있었다. 즉, 김영삼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부통치를 종식시키고 최초의 문민정부를 열었으며, 그 성패를 떠나 ‘국제화·세계화’라는 굴직한 시대적 이슈를 선점했다. 그러나 임기 말년에는 아들 김현철의 구속과 외환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경제↘정책에 실패했다는 과오를 안게 되었다. 그로 인해 국민들이 경제적 고통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정치적 재기에 성공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명실상부한 ‘경제대통령’이란 명예를 안았다. 더욱이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었다. 

이에 반해 노무현은 ‘구시대의 막내’로서 이 땅의 권위와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에 의하여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정치적 실험을 했다. 참여정부 5년 동안 노무현은 일국의 최고권력자 혹은 통치자로서의 성숙되고 권위 있는 대통령이기보다는 좌충우돌하는 현장 운동가, 즉 투사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기본적 인권과 노동탄압에 대해 우리 사회의 각 구성원과 이해집단은 억눌린 분노를 봇물처럼 토해냈다. 억압받고 탄압받는 이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 편에서 싸워온 노무현에게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떠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변호사와 국회의원으로 기성의 정치세력과 사회적 불합리에 대해 온 몸으로 부딪히며 싸우는 것과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행동하는 것은 크나큰 차이가 있다. 이 점에서 노무현은 다소 경솔한 대통령이었고, 신중하지 못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야당과 반대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악용되었고, 그가 지향하는 정치 및 사회개혁에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어쩌면 김영삼·김대중 대통령과 달리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 된 그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10년’-부동산은 ‘불패’인가

‘잃어버린 10년’. 이 표현은 한나라당이 국민정부와 참여정부 10년간의 경제정책은 실패했다고 하여 정치적 구호로 삼은 말이다. 이 말은 참여정부 집권 기간 내내 노무현의 발목을 잡았고, 경제발전과 일자리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 수준은 높았다. 

노무현은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경제문제의 본질적 문제가 ‘불균형’에 있다고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균형을 세 가지, 즉 사회적 불균형, 지역적 불균형, 경제적 불균형으로 나누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였다. 노무현은 이 정책의 실현을 통해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사이에 차별이 없는 균형 잡힌 세상, 즉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부동산 거품은 지금도 우리 경제에 있어 시한폭탄과 같다. 높은 부동산 가격은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수도권(특히 서울)과 지방간 격차를 유발하여 지방의 불균형발전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은 경제적 균형을 확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 노무현도 이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참여정부도 여러 차례에 걸쳐 강도 높은 부동산 가격 규제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야심차게 실행한 부동산정책은 ‘강남불패신화’를 깨뜨리지 못하고, 정권 말기에 도입한 종부세 역시 여론의 호된 질타만 받았을 뿐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부동산 중심의 자산에서 벗어나 주식과 예금, 그리고 현금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참여정부의 정책은 그 방향성 면에서는 적절하다. 다만 부동산시장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분석과 유동성 확보 실패, 그리고 대국민을 대상으로 한 신뢰와 설득에 실패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상호신뢰회복에 바탕을 둔 대북관계

나는 남북관계의 회복을 막는 가장 본질적 요인 중의 하나는 ‘상호신뢰부재’라고 생각한다. 남북이 서로를 믿지 못하니 직접 대화하고 문제를 풀기보다는 자꾸 미국의 눈치를 본다. 

또한 남북관계 개선의 어려움은 ‘북한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바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헌법’ 제3조는 ‘영토조항’으로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동조에 의하면,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는 모두 ‘대한민국의 영토’에 속하므로 북한체제는 인정될 수 없다. 국제법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성립, 유지, 존속되고 있는 북한체제는 ‘괴뢰정권’으로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모든 정권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당면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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