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자르고, 저긴 지우고’, 오랫동안 우리 문화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인 검열은 1990년대 이후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방송사 심의, 뮤직비디오 사전심의제 등 다양하게 남아있는 검열제의 검은 손길은 여전하다. 검열은 비단 대중문화를 넘어 인디밴드, 연극 등에도 적용되고 있어 대학생에게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본지에서는 검열의 역사와 현재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알아봤다●

식민지의 문화의 싹을 밟다.

“모던걸 아가씨들 둥근 종아리 데파트(백화점) 출입에 굵어만 가고 / 저 모던보이들의 굵은 팔뚝은 네온의 밤거리에 야위어 가네”라며 일제 치하 ‘신세대’를 풍자한 ‘뚱딴지 서울’(고마부 작사. 1938)은 풍속문란의 이유로 ‘거리 연주 금지’ 처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의 검열은 크게 치안과 풍속에 초점이 맞춰졌다. 1936년 신문기사 금지표준에 따르면 남녀가 포옹하거나 입 맞추는 장면, 심지어 피임 방법을 소개한 책도 검열의 ‘빨간 도장’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하게 검열했던 분야는 바로 식민지 현실을 풍자하거나 비판했던 항일 저항문학이었다. 당시 문인들은 일제의 검열에 저항하기 위해 일본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육십갑자’를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이용했다.

금지곡 이유? 엿장수 마음대로~

해방 이후 검열은 왜색풍, 퇴폐 및 창법 저속 그리고 사회 비판적인 노래를 검열하는 ‘기타’로 나뉘었다. 일제의 잔재를 소탕하자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1963년부터 70년대 초까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 총 344곡에 대해 왜색, 창법 저속 등을 이유로 방송 금지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64년 발표됐다가 68년 왜색을 이유로 금지된 ‘동백 아가씨’는 당시 광복 이후 가장 많이 팔린 노래였다. 대한민국 가요 심의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시기는 역시 1975년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가수들의 대마초 관련 사건들이 터지자 정부의 ‘가요정화대책’이 발표됐다. 이에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백여 곡이 넘는 곡을 ‘금지가요’로 묶었다. 대표적인 곡이 신중현과 엽전들이 74년 8월 발표한 ‘미인’이다.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로 시작하는 ‘미인’은 퇴폐적 가사와 저속한 창법이라는 이유로, 송창식이 부른 ‘왜 불러’와 ‘고래사냥’은 ‘시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하지만 ‘75년 가요 대학살’ 직후 해당 금지곡이 들어가 있는 음반과 카세트테이프의 판매가 오히려 늘어나는 기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정태춘과 서태지, 공륜를 뒤엎다

1990년대 초반까지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의 사전심의는 우리 가요계를 옮아맸다. 하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제기할 수도 없었던 시절에 한 가수가 반기를 들고 나섰다. 바로 가수 정태춘이다. 자신의 첫 앨범 <시인의 마을>(1978)이 검열을 통해 수정되자 공륜에 소명서를 내고 심의회의에 찾아다니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1991년 당시 검열의 근거가 됐던 ‘음반 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 위반 운동을 시작하면서 심의에 통과되지 못했던 <아, 대한민국>을 그대로 발표했다. 또한 93년 <92년 장마, 종로에서> 또한 심의 결과에 상관없이 발표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냉혹했다. 그를 94년 검찰에 기소한 것이다. 하지만 이 덕분에 가요 사전 검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됐고 공륜 폐지의 결정적 사건이 터졌다. 바로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4집 수록곡 ‘시대 유감’의 가사가 사회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결정되자 이에 서태지가 아예 노랫말을 뺀 연주곡만으로 ‘시대 유감’을 발표한 것이다. 이 일로 국민의 심의폐지에 대한 여론이 거세지자 결국 공륜의 음반 및 노래에 대한 사전심의제도는 1996년 6월 7일 폐지됐다. 하지만 각 방송사 심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있어 검열은 ‘현재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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