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6.15 남북공동선언과 노벨평화상
2000년 6월 15일은 분단 55년 만에 맞이한 쾌거의 하루로 기록된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날이기 때문이다.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1국가 2체제의 통일방안 지향, 이산가족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해결,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활성화를 통한 상호 신뢰회복,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개최 합의 등으로 요약되는 5개항의 공동선언문이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분단 당사국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주변 4강, 특히 미국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이전 정부당국과 달리 김대중은 통일문제 전문가로서 자신의 역량을 대내외적으로 떨쳐 보였다. 끊어진 경의선과 경원선 철도가 이어지기 시작하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같은 남북경제협력이 가시화되었다. 적대적인 긴장감이 높았던 군사분계선의 싸늘한 철조망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만큼이나 부드러워진 듯 보였다.


이와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김대중은 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국가적인 경사였으나 노벨상을 받으려고 수십억의 로비를 했다는 비열하고 야비한 풍문이 전국을 떠돌았다.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인기가 높았던 소련 최후의 공산당 서기장이자 최초의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운명이 김대중과 비슷하다. 해외에서는 지적인 풍모와 오랜 경륜으로 커다란 영향력과 인기를 누렸으나, 국내에서는 정적들과 수구언론으로부터 언제나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했던 비운의 정치가가 김대중이었다.

정말로 쓸쓸하고 너무도 허무한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명박 정권의 주구노릇에 앞장 선 정치검찰의 무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수사에 온몸으로 항거한 결과였다. 인간 노무현을 대통령 노무현으로 인도한 사람이 김대중이었다. 정치 선배이자 동료로서 김대중은 노무현의 인간 됨됨이를 알아보고 그를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등용하는 등 노무현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너무도 뜻밖에 찾아온 노무현의 투신자살은 김대중의 죽음을 재촉하였다. 노무현의 영결식장에서 눈물과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오열하던 인간 김대중. 그 역시 같은 해 8월 18일 향년 85세로 세상을 하직한다. 불과 석 달 사이에 두 사람의 전직 국가원수를 잃어버린 국민들은 망연자실하였다. 자신이 키우고 만들어낸 정직한 대통령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명박 정권을 김대중은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김대중은 영면함으로써 우리와 작별하였으나, 그는 오래도록 우리 기억에 남을 것이다. 평화적인 정권교체에 성공하고, 아이엠에프 경제위기를 극복하였으며,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위한 초석을 놓은 김대중. 반면에 그는 친 재벌과 대기업정책을 펼침으로써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보듬지 못했다. 더욱이 노무현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의 마지막 생은 정말로 쓸쓸하고 너무도 허무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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