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가 80퍼센트의 투표율 속에 실시되었다. ‘새정치국민회의’ (‘민주통합당’ 전신) 김대중 후보가 ‘신한국당’ (‘새누리당’ 전신) 이회창 후보를 39만 557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이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지만,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풍비박산 나버린다.


그 이후 한국에는 군부독재가 지속됐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군사정권이 장장 30년 이어졌다. 노태우는 여소야대의 난국을 타개하고자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인에게 합당을 제안한다. 김대중은 노태우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지만, 김영삼과 김종필은 그에 호응하여 민자당이 출범하게 된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모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한국의 강고한 수구보수 세력의 총결집을 완성한 장본인이 야당투사 김영삼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최고 권력을 향한 인간의 어처구니없는 변신!


1997년 대선은 피 말리는 접전이었다. 김대중은 자민련의 김종필과 ‘디제이피 (DJP) 연합’을 이뤄냈지만, 이회창은 이인제의 탈당을 막지 못했다. 3자대결로 맞붙은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이정표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1945년 패전 후 경제성장을 거듭하여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일본이 자민당 일당독재로 50년을 날려버린 것과 비교하면 한국의 정치 성숙도는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경제와 정치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성공한 아시아 유일국가 대한민국이란 자랑스러운 호칭은 이때부터 발원한다.
 
아이엠에프 사태와 금 모으기 운동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을 옥죈 것은 김영삼 정부의 방만한 경제운용과 조급한 세계화전략이 몰고 온 경제파탄이었다. 국고에 남은 돈이 20억 달러였다는 사실은 당시 한국경제의 절박한 상황을 웅변한다. 김영삼 정부는 아이엠에프(IMF: 국제통화기금)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였고, 그 후과는 김대중 정부에게 그대로 전가되었고, 지금까지도 씻기 어려운 상흔을 남기고 있다.


부족한 외화를 확충하기 위해 금 모으기 운동이 널리 확산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물산장려운동’에 버금가는 열기가 전국을 뒤덮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경제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실금융기관과 대기업들이 하루가 멀다않고 퇴출되었고, 거리에는 노숙자와 실업자가 넘쳐났다. 오늘날 서울역에서 만나게 되는 노숙자들이 처음 등장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김대중은 경제위기를 극복했으나, 1971년 <대중경제론>에서 보여준 서민과 중소기업에 대한 시각은 부자와 대기업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롯데호텔노조와 사회보험노조, 대우자동차노조 등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이 계속되었다. 신자유주의 광풍의 선두에 선 아이엠에프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하고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고, 공권력으로 그들을 탄압한 행위는 어떤 방식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야만적인 폭거였다.
만일 1971년 제8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박정희를 꺾을 수 있었다면 한국의 정치와 경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흐를 만큼만 흐르는 법!” 박정희의 하수인으로 유신본당을 자처한 김종필과 연합한 다국적군 장수 김대중은 그 한계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임기 말의 그는 늙고 이빨 빠진 종이호랑이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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